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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83년 '녹화사업' 기간 중 군대에서 의문사한 6명의 대학생들. 왼쪽 상단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두황(고려대), 이윤성(성균관대), 최온순(동국대), 한희철(서울대), 정성희(연세대), 한영현(한양대).
ⓒ 유가협 홈페이지
80년대 보안사의 강압과 가혹행위 속에 동료들에 대한 배반을 강요당했던 250여 명의 강제징집-녹화사업 피해자들. 의문의 죽음 6건을 뒤로 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이 '살인적인 정훈교육'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을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www.truthfinder.go.kr, 이하 의문사위원회)가 11일 "7월중 5차례에 걸쳐 당시 피해자들의 집단 간담회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의문사위원회는 또한 늦어도 8월말까지 전두환 전 대통령을 포함한 5공권력 핵심부를 조사할 방침도 시사했으나 시일이 촉박하고 강제수사권이 없는 상황에서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의문사위원회가 파악하고 있는 강제징집/녹화사업 피해자 규모는 군 당국의 공식 통계로만 447명(81.11∼83.11)에 달하고, 이밖에 문무대 소요(81년 11월) 연루 고려대생 109명과 한국외국어대생 56명, 무림/학림 사건 관련자들까지 망라된다.

의문사위원회는 오는 17일부터 22일까지 5차례에 걸쳐 집단간담회를 열어 녹화사업(82.9∼84.11) 대상자 256명중 200여명의 증언을 청취할 계획이다.

문덕형 제2상임위원은 "녹화사업 관련 사망자가 6명이나 되는데, 개별사건 조사로는 녹화사업의 운용 시스템 등 전체 윤곽에 접근하기 힘든 상황이다. 녹화사업 피해자들의 증언 청취 등 지금과 다른 조사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녹화(綠化)사업이란?

1980년 광주민중들의 민주화 운동을 폭력으로 짓누르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광주학살'의 진상을 접한 대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에 부딪치게 됐다.

5공 정권은 대학생들의 강력한 저항에 대해 81년 11월부터 검거된 시위 주동자-참가자들을 강제 징집으로 입대시켰다. 자의에 반해 억지로 군대에 보내진 학생들중에는 소아마비로 신체가 불편한 사람, 연령미달자, 3대 독자도 있었다.

'녹화사업'이라는 말은 "좌경사상으로 붉게 물든 학생들을 푸르게 순화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향파악->연행->등급분류->강제입영->특별정훈교육'으로 이어지는 녹화사업 과정에서 보안사 분실에 수시로 끌려가 조사를 받던 학생들은 보안사 요원들에게 수시로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프락치 공작에 말려든 학생들은 특별휴가 또는 외박 형식으로 학교에 보내져 동료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강요받았다. 82년 9월부터 시작된 녹화사업은 84년 11월 전담부서가 없어지며 공식적으로는 폐지됐으나 보안사 차원의 프락치 공작은 9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시사평론가 유시민씨는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84년 "제대를 불과 두 달 앞둔 83년 3월 보안사에 대한 공포감을 이기지 못하고 녹화사업에 응해 벗을 파는 대신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는 내용의 항소이유서를 발표, 관제프락치 공작의 전모를 폭로한 바 있다. / 손병관 기자
의문사위원회는 지난 1년 반 동안 보안사 사령부 및 예하 부대 관계자 100명 이상을 조사했는데, 대부분은 "좌경 학생들을 설득과 토론으로 순화시켜 활기찬 군 생활로 이끌었다"며 오히려 정당성을 강변하거나 이미 사망한 사람이나 해외 이민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보안사 주도의 녹화사업 진행'을 인정한 박준병 당시 보안사령관은 정작 대통령보고 여부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고 답했고, 80년대 초 시위 관련 학생들의 신병 처리에 관여했던 검찰 및 경찰 출신 국회의원 3명은 소환에 불응했다.

소환 거부 의원들은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였던 정형근(부산 북-강서 갑), 최연희(강원 동해-삼척)의원과 치안본부장이었던 유흥수 의원(부산 수영)으로, 이들은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다.

그러나 의문사위원회는 조사 과정에서 작년 12월 최경조 전 보안사 대공처장(65)으로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이 82년 보안사 간부들과의 청와대 만찬에서 '녹화사업'을 지시했고, 자신이 사업계획을 입안한 후 대통령에게 보고해 결재를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의문사위원회는 전씨의 증언을 진상규명의 필수요소로 보고 있다.

바짝 다가온 조사 마감시한과 유관기관들의 비협조도 의문사위원회의 발빠른 행보를 재촉하고 있다. 박래군 조사3과장은 "9월16일로 조사 시한이 임박한 상황에서 녹화사업 조사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기자 간담회가 진행중인 지금 이 시각에도 조사실에서는 당시 문교부 정책입안자들의 소환조사가 진행중이다"고 말했다..

황인성 의문사위원회 사무국장은 "보안사(현 기무사), 법무부 등 유관 기관들도 '자료가 없거나 이미 파기됐다'고 자료 제출에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지금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된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 청취도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녹화사업 기간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대학생들은 정성희(연세대. 82. 7. 23. 사망. 5사단), 이윤성(성균관대. 83. 5. 4. 사망. 5사단), 김두황(고려대. 83. 6. 8. 사망. 22사단), 한영현(한양대. 83. 7. 2. 사망. 7사단), 최온순(동국대. 83. 8. 14. 사망. 15사단), 한희철(서울대. 83. 12. 11. 사망. 5사단) 등 6명이다.

이중 강제징집자는 아니었으나 공안사건에 관련돼 보안사 심사과에서 조사를 받았던 한희철의 경우 조사과정에서 전기고문을 두 차례 당하고, 몽둥이로 구타당하는 등 가혹행위에 대한 두려움과 동료들을 배신한 데 대한 죄책감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방부는 88년 국정감사에서 "6명의 죽음은 모두 신상 비관에 의한 자살이었다"고 밝혔지만, 의문사위원회는 보안사가 사망과정에 개입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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