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선거권'이었다면, 세월호 수습은 달랐을 것이다

청소년 참정권 있었다면, 더 많은 변화 있었을 것... ‘가만히 있지 않을 권리’를 위해 함께 걷자

등록 2018.04.13 10:32수정 2018.04.1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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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4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현재 국회 앞에서는 오늘로 22일째 '선거연령 하향 4월 통과'를 촉구하는 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오는 14일에는 청소년 참정권과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소년과 교사들의 도보행진도 함께 열린다. 청소년 참정권과 세월호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4.16세월호작가기록단의 일원으로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세월호 형제자매와 생존학생 이야기> 집필에 참여했던 배경내 활동가가 보내온 글을 함께 나눈다. - 기자 말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다수가 청소년이라고 해서 세월호 참사가 청소년 사건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4년 전 2014년 4월 16일 그날, 그리고 그날 이후 일어난 일들은 청소년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일련의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세월호 참사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또래들 다수가 죽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세월호에서 국가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신의 위치'를 목격했거나 적어도 어떤 암시 같은 걸 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가만히 있으라!', 이어진 명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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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외벽에는 세월호 참사 4주기를 앞두고 노란리본과 함께 “잊지않겠습니다”라고 문구가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다. 2018.04.03 ⓒ 최윤석


4년 전 세월호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 여러 번 방송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바람에 대다수 승객들이 탈출할 시간을 놓치게 되었다. 전문가라고 생각했던 선원의 지시를 믿은 학생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명령을 내린 자들, 그 믿음을 배반한 자들에게 잘못이 있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어른들만 믿고 기다린 착한 바보' 또는 두려움에 떨다가 희생된 '무기력한 피해자'의 이미지로 유통되곤 했다. 이후 생존학생들의 증언으로 밝혀진 바와 같이 실제 학생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기 위해 애썼고, 친구들의 탈출을 도왔고, 팔이 마비되는 줄도 모른 채 승객 구조에 열심이기도 했다. 평소에 청소년을 바라보던 사회적 통념대로 탈출 직전의 모습들을 멋대로 상상한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날 이후에도 수없이 이어진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들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세월호의 애도와 기억 방식을 결정하고 축소시키는 핵심적인 단어였다. 치유는 자기가 겪은 사건에 이름을 붙이고 사건의 원인을 알고 대처법을 알아야 가능한 과정이다. 단지 심리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가족 형제자매, 생존학생, 그리고 다수의 청소년들은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정보와 언어,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이니까 공부나 해', '이건 어른들의 일이다', '침몰한 나라 어른들이 건져내마'라면서 애도의 주체로부터 청소년을 밀어낸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청소년에게는 '슬픔'만이 허락되곤 했다. 추모는 허락하지만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은 안 된다는 것, 정치의 자리로부터 배제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위치였다.


유가족 형제자매와 생존학생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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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창비에서 배포한 <다시 봄이 올 거예요> 홍보 이미지 ⓒ 창비


유가족 형제자매와 생존학생의 구술기록집 <다시 봄이 올 거예요>에서도 잘 드러나듯, 10대와 20대 초반의 유가족 형제자매들은 누구도 "너는 어떠니?"라고 물어봐주지 않는 시간을 외롭게 견뎌야 했다. 살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존중받은 경험이 없다 보니 형제자매를 잃은 슬픔과 분노를 비청소년들에게 털어놓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어느 학교에서는 유가족 형제자매들끼리 몰려다니면서 학교 분위기 흐리지 말라는 식으로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유가족 부모들조차 처음에는 형제자매들이 진상규명 운동에 나서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식들까지 궂은일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겠지만, 그 바람에 유가족 형제자매들이 진상규명의 또다른 주체로 등장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생존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애들이 감당하기 힘든, 평생 잊을 수 없는 큰일을 겪었다'며 위로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정작 이들을 보호하는 방식에서 당사자들의 의견을 고려하는 않는 일들이 잦았다. 상처받는다는 이유로 친구의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한 이들도 많았고, 단원고에서 교실 존폐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일 때도 정작 학생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유가족 형제자매와 생존학생들은 세월호 사건에서 '목소리 없는 존재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애도를 허락받았고, 학생의 본분 또는 자식노릇이라는 역할로 서둘러 복귀할 것을 요구받았던 것이다. 목소리를 지우는 것, '진상규명'이라는 정치적 과정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은 청소년에게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은 현실과 묘하게 닮아있고 연결되어 있다. <다시 봄이 올 거예요>가 발간된 이후에서야 이들의 목소리에 사회가 조금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나 지난 뒤에서야 말이다. 

만약 청소년에게 참정권이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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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소년이 4.16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쓴 구호 ⓒ 4.16기억과행동 청소년실천단


4월 16일 그날, 청소년에게 참정권이 있었다고 해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가정이다. 그러나 적어도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에서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는 있었으리라는 건 확신할 수 있다. 세월호특별법이 더 빠른 시간에 제정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어떤 방안이 필요한지를 청소년의 경험과 지혜가 보태어져 찾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판단하지 마라, 시키는 대로 해라, 사회와 정치에 관심 가지지 말라. 곧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기초하여 촘촘하게 짜인 학교교육도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4년 전 6월, 세월호 이후 치러진 첫 지방선거에서 이른바 '진보교육감'이 전국 각지에서 대거 당선되었다. 만약 청소년에게 참정권이 있었다면 더 많은 지역에서 '진보교육감'이 당선되었을지 모르며, 2013년 전북에서 제정된 것을 끝으로 멈춰버린 학생인권조례도 더 많은 지역에서 제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청소년들의 고통과 외침이 이토록 정치로부터 외면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 이후 '안전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중요한 사회 의제가 되었다. 안전은 제도와 시스템만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의 미투 운동이 보여주는 것처럼, 평등해야 안전해질 수 있다. 청소년이 허락을 받아야 움직이는 존재, 인간이 아닌 물건처럼 취급받는 존재, 무기력과 무관심을 강요받는 존재에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학교와 사회, 정치 곳곳에서 '평등한 시민'이 될 때 안전도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만18세 이하로 선거연령을 하향하는 것은 시민적 평등을 만들어낼 첫 시작이다.

침몰한 나라를 구하는 촛불혁명에 많은 청소년들이 함께했다. 세월호를 기억하고 진상규명을 함께 만들고 싶은 청소년들이 또한 자신도 시민이며 주권자라고 말하며 선거연령 하향을 촉구하고 있다. 그 마음들을 연결한 도보행진이 14일에 열린다. 함께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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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열리는 집회 포스터 ⓒ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청소년참정권 #세월호 #세월호 진상규명 #선거연령 하향
댓글7

촛불광장의 동료였던 청소년들에게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취지로 모인연대체입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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