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불가 펜트하우스 출입카드... 사무치는 외로움

[소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 'Another Holocaust' 44화

등록 2016.02.12 16:38수정 2016.02.1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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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화에서 이어집니다.

"별 말씀을…. 그냥 어쩌다 보니까 전국대학생연합회 회장이 돼서 그런 거죠, 뭐. 일단 맡았으니까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고요."


나름대로 뜻이 있다. 일본은 한국처럼 학력 차별이 심하지 않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도쿄대, 게이오대, 와세다대도 아니고, 다른 명문 지방대도 아닌 서양요리를 전공한 전문대 2학년생이 전국적인 대학생 지도자가 된 사례는 드물다.

"이번에 간사이 쪽에 가서 상황을 잘 전하고, 이번 거국적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해 달라고 호소해야 하네. 이제 자네는 학생단체 '실즈' 공동대표일 뿐 아니라 우리 쪽 전위대 대장이야."

아직은 애송이인 슈이치는 김원국의 말에 굳은 의지를 표정으로 보인다. 이제는 리에 선생 차례다.

"저는 일단 지난 주에 도쿄도를 중심으로 사회과 교사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들 10명 중 7, 8명은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표했고요. 지금 전국 각 지역에 있는 사회과 선생님 중 명망 있는 분들도 기꺼이 지역대표로 나서겠다고 전해왔고요."
"선생님들이 보수적인 줄 알았는데 조금은 의외네요."

김원국은 생각 없이 얘기했다. 그러나 리에 선생은 조금 발끈한다.


"사회과 교사도 자신의 직업윤리라는 게 있죠. 사회가 잘못 돼 가는데 방관하고, 눈을 돌린다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제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 Society)에 나오는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까지는 못 돼도 제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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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은 'carpe diem(오늘에 충실하라.)'이라는 라틴어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진정한 스승은 입시를 잘 치룰수 있도록 성적을 높이는 교사가 아니라 인간과 인생을 가르쳐주는 선생이라는 것을 일러준다.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일본도 한국과 같이 교권이 무너진 지 오래다. 한국보다는 덜 하지만 교사들은 아이들을 방치하고, 학생들은 학교와 수업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초·중·고교의 이른바 '이지메(왕따)' 탓에 자살하는 학생수도 한국 못지않다. 불행히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는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교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마세요. 아직까지 일본 교육계에 리에 선생님 같은 분이 많아서 희망적이라는 얘깁니다."

김원국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바로 말을 바꾸는 순발력을 보인다. 다음으로 김윤아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졌거나, 회원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근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문화라운지 부시삽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회원들을 나름대로 참여시키는 일도 진행 중이란다.

회의가 대충 끝나간다. 미키는 계속 궁리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NYT 기자인 패트릭 가와구치가 알려준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하인리히 슈미트 기자와 주간지 <슈피겔>의 슈테판 뮐러 기자를 지렛대 삼기로했다. 어차피 일본 국내 언론이 외면할 게 뻔하다면 바깥으로 눈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미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법 수용소 정보를 제공해 NYT를 매개로 세계적인 큰 메아리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NYT에다 독일 유력지, 그것도 일간지와 주간지에서 연속으로 일본에 대한 추악한 의혹을 드러낸다는 속셈이다. 사실 상황만 따진다면 미국은 미국대로, 유럽 각국은 유럽 각국대로 제 앞가림에도 정신 못 차리고 있다. 남의 나라 제사상에 대해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 공통 주요 관심사인 인권에 대해서는 무작정 등 돌릴 수는 없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고 수천 명, 누가 봐도 수상한 대규모 실종 사건이기 때문이다. 미키의 준비성이 빛난다. 방송사를 그만둔 미키는 남아도는 시간에 벌써 이들과 이메일로 교분을 쌓아 놓았다. 이제 기사거리를 만들고 날만 잡으면 된다.

전일본공동체본부 차원에서 전국 시민단체와 연계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을 마지막으로 회의가 끝났다. 크게 보면 민주당, 공산당, 사민당 등 제도권 야당들과 진보 시민단체들 전국 연계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도화선에 불만 댕기면 민심이 폭발할 최소한의 준비가 됐다는 얘기다.

워낙 집중해서인지 임산부 미키는 하품이 난다. 무슨 회의든 회의는 많은 체력을 앗아간다. 쓸데없는 회의일수록 더 많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하지만 미키에게 이번 회의처럼 '미치광이 일본'을 막으려는 시민운동 관련된 어떤 회의도 허투루 다룰 수 없다. K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 조슈아가 아버지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언제든지 시간과 정신과 체력을 무한대로 바칠 각오가 돼 있기 때문이다.

"실장님, 다나카 단장님과 미나미 의원이 심상치 않습니다."

다나카 단장 수행비서 하시모토 다쿠야가 핸드폰을 통해 다케우치에게 전한다. 하시모토는 다케우치가 심어 놓은 사람이다.

"무슨 소리야? 자세히 얘기해 봐."
"네. 여기 '라 스트라다'라는 술집입니다. 아카사카에 있는. 지금 다나카 단장님과 미나미 의원이 만나 술 마시고 있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잖아"
"아니, 다나카 단장님이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통화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는 것입니다."

"다나카 단장이 뭐랬는데?"
"무슨 '여우사냥'을 곧 시작할 것이라면서 미우라 총리님과 실장님 이름을 들먹였습니다."
"뭐라고 하면서 총리님과 나를 입에 올렸는지 상세히 말해 봐."
"그건 잘 못 들었습니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서 통화하는 바람에요."
"알았어. 오늘처럼 무슨 얘기든 귀 기울여 듣고, 잘 감시하도록. 고생했어."

다케우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 인간들이 무슨 꿍꿍이지? 어떤 나쁜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아까 총리님과 만났을 때 다나카 단장 표정이 그리 좋지는 않아 보였는데….'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다. 그리고 금세 결론을 내린다. 눈치 빠른 다케우치는 분명히 '여우사냥' 대상이 자신과 미우라 전 총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짐작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퍼즐을 모아본 다음 내린 분석이다.

우선 미나미 의원은 다케우치를 시샘하고 있다. 지난번 말다툼도 그래서 비롯됐다. 다나카 단장은 명색이 단장이다. 그렇지만 미우라 전 총리는 모든 것을 챙기고 자기가 결정하려든다. 만기친람(萬機親覽)을 하지 않고서는 못 믿겠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처음 다케우치가 천황 선양 얘기를 한 뒤 다나카 단장은 앞장서서 기획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일은 자기가 구상해야 한다며 빼앗았다. 이처럼 다나카 단장은 큰일부터 작은 일까지 사사건건 전 총리 재가를 받아야 하는 것에 못마땅해 했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나. 그렇게 다나카 단장과 미나미 의원이 한패가 됐다는 게 다케우치의 최종 결론이다.

'여우사냥이라. 일본에게 눈엣가시 같던 조선 왕비 민비를 죽일 때 작전명이다. 그렇다면 다나카 단장과 미나미가 무슨 음모로 나와 총리님을 해치려고 들 것인가.'

다케우치가 거기까지 알 수는 없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 움직임을 파악해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역공을 펼쳐서 그들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효토코'를 써야 한다. 가면 효토코를 쓰고 '오도리'를 출 때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래야 상대방이 마음을 놓게 만들어서 갑작스런 역습에 저항도 못하고 당할 테니까.'

오래된 영화 <스팅>(The Sting, 1973)에서 자니 후커(로버트 레드포드)는 동료를 잃고 나서 복수에 나선다. 사기 치는 데는 '대가(大家)' 반열에 오른 곤돌프(폴 뉴먼)을 찾아 '설계작업'을 시작한다. 욕심 많고 의심이 많은 조직 폭력배 두목 로네건(로버트 쇼)이 먹잇감이다. 그의 욕심과 의심을 역이용해 사설경마장을 영화 세트처럼 꾸미고, 죽은 동료의 친구들이 찬조 출연을 한 다음 거금을 로네건으로부터 빼앗는다는 얘기다.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꺾어야 하는 다케우치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특히 사기를 치더라도 상대방이 속은 것을 모르도록 해야 한다는 다케우치의 좌우명을 심어준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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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작품 <스팅>에서 곤돌프(폴 뉴먼)과 후커(로버트 레드포드)는 탐욕과 의심의 화신인 조직폭력배 두목 곤돌프(로버트 쇼)를 상대로 그 탐욕과 의심 때문에 거액을 사기당하게 만드는 '설계 작업'을 꾸며 성공한다. ⓒ 영화 <스팅>


무심코 다케우치는 전화한다. 오하라 단축번호 2번을 누른다. 그러나 무심한 핸드폰에서는 전화번호가 결번이라는 안내만 나온다. 그제야 자신이 '처리'한 오하라를 떠올린다. 버릇이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다른 번호로 전화한다. 행동 요원인 후지와라다. 그에게 다케우치는 태스크포스 팀을 꾸미라고 명령한다. 다나카 단장과 미나미 의원 음모에 또 다른 음모로 맞서기 위해서다.

통화를 마친 다케우치에게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다. 웃옷을 챙기고, 주섬주섬 책상을 정리한다. 그리고 클럽 '라 스트라다'로 향한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다나카 단장과 미나미 의원은 벌써 자리를 떴다.

"스텔라 좀 오라고 해."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면서 다케우치는 스텔라를 찾는다.

"사장님, 이젠 안 나오세요."
"뭐? 왜 안 나와? 결혼이라도 하나?"

말을 곱게 안 하는 게 다케우치 천성이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일 그만두셨어요."
"언제부터?"
"지난주부터요."
"알았어. 얼음물이나 한 잔 줘."

다케우치는 스텔라에게 전화한다. 또 결번이란다. 화가 나 또 핸드폰을 던져버리려다 멈춘다. 주문한 얼음물이 나오기 전에 클럽에서 나간다. 클럽에서 가까운 스텔라 집으로 직접 찾아가기 위해서다. 채 10분도 안 걸렸다. 여느 때처럼 엘리베이터에 출입카드를 넣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는다. 한두 번 더 넣어보지만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부아가 나는데 이제는 치밀어 오른다. 애꿎게 관리인을 찾는 인터폰 벨만 마구 누른다. 관리인이 인터폰을 받자마자 다짜고짜 낮춤말로 고성을 지른다.

"이놈의 엘리베이터가 왜 문이 안 열려? 빨리 열어!"
"출입 카드를 넣으셨습니까?"
"넣었는데도 안 되니까 인터폰 한 거 아냐!"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두터운 유리로 된, 잠겨 있는 계단문이 열리면서 늙수그레한 관리인이 나타난다. 다케우치로부터 출입카드를 넘겨받아 카드 투입구에 넣는다. 하지만 역시 카드를 뱉어 낼 뿐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 역시 한두 번 더 투입하지만 엘리베이터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관리인은 무전기를 통해 카드번호를 부른다. 잠시 뒤 무전기를 통해 여직원 목소리가 들린다.

"그 카드는 일주일 전에 폐기됐습니다. 19층 펜트하우스 거주자 명의로 돼 있지만, 그분께서 이사 간 다음 모든 출입카드는 이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길길이 성마른 모습을 보이던 다케우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이제는 태도를 바꾼다. 낮춤말이 아닌 경어를 쓰면서 묻는다.

"그럼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십니까? 아신다면 알려주세요."
"아실만한 분이…. 설사 안다고 해도 개인 사생활이라 말씀드릴 수 없고요. 실제로 저희도 그분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습니다."

관리인은 같잖다는 눈빛으로 다케우치를 훑어본다. 그리고 말없이 계단문을 닫고 사라진다. 홀로 남은 다케우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없이 돌아선다.

'모두 날 떠났다. 이제 마음 놓고 술 한 잔 같이 할 사람도, 우울한 얘기 들어줄 사람도 하나 남지 않았다.'

초가을 한밤 다케우치는 외로움을 사무치게 느낀다.
#죽은 시인의 사회 #로빈 윌리엄스 #스팅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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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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