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1 22:45최종 업데이트 23.06.01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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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사람들에게 갯벌은 밭이자 논이다. 굴, 조개, 낙지 같은 해산물이 아주 오랜 세월 사람들을 먹여 살려 왔다. 맨손어업은 호미나 꼬챙이 등을 사용해서 수산물을 잡는 것을 일컫는다. 맨손어업에 쓰이는 도구들은 대부분 대장간에서 만들어진다. ⓒ 정진오


몇 년 전 '누가 맨 처음 무엇을 했을까'라는 식의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책이 나왔다. 거기에 '제일 처음 굴을 먹은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초의 굴 먹은 장소는 무려 16만4000년 전 남아프리카 호모사피엔스 거주지 동굴로 좁혀졌다. 그곳에서 숯, 석기, 굴 껍데기 등이 발견되었다. 여전히 그런 것처럼 날것 그대로를 좋아했을 수 있지만, 숯이 있던 것으로 보아 불에 익혀 먹었을 수도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오래된 패총(貝塚)이 해안가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굴, 꼬막, 바지락 등의 껍질 무더기였다. 남아프리카처럼 16만4000년 전은 아닐지라도 신석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왔으니 우리의 패총 역사도 꽤 오래되었다.


남아프리카 호모사피엔스보다 먼저, 우리 인류 중 누군가는 맨 처음 갯벌에서 움직이는 낙지, 게, 조개, 소라 같은 것들을 보았을 거다. 아니, 갯벌에서 새들이 길쭉한 입을 갖다 대고서 뭔가를 찾아 먹는 장면을 본 게 먼저였을 게다. 그리고는 새들이 하는 대로 뾰족한 막대기를 갖고 갯벌을 들쑤셔 그 속에 있던 것들을 찾아냈을 거다. 그 후로 갯벌은 인류의 식량창고가 되었다.

맨손어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바닷가 사람들에게 갯벌은 밭이자 논이다. 굴, 조개, 낙지 같은 해산물이 아주 오랜 세월 사람들을 먹여 살려 왔다. 맨손어업은 호미나 꼬챙이 등을 사용해서 수산물을 잡는 것을 일컫는다. 그걸 갯벌로 한정하면 '갯벌어로'다. 한반도의 갯벌은 생물 다양성 면에서도 세계적으로 으뜸이다. 정말 많은 것들이 갯벌에서 나온다. 우리 정부는 2021년 12월, 오래된 역사와 바닷가 마을 고유의 공동체 의식 등을 인정해 갯벌어로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지난 5월 19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장봉도 야달항 갯벌에 나갔다. 저 멀리, 아낙네 셋이서 눈만 내놓은 '갯벌 복장'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열심히 뭔가를 캐내고 있었다. 손에는 호미 하나씩 들려 있었다. 동네 어른에게 물어보니 가무락을 잡는 거라고 했다. '가무락'은 조개인데, 색깔이 검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아낙들이 갯벌을 오가며 허리를 숙여 조개를 잡고 있을 때, 마침 그곳에 저어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저어새는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며 부리로 갯벌을 휘저었다. 갯벌은 그렇게 사람과 저어새 둘 다를 위한 공동의 밭이 되었다.

조새, 호미, 삽, 작살... 맨손어업 도구들
 

인천 옹진군 북면 장봉도 야달항 앞 갯벌에서 동네 주민들이 호미 하나씩 들고서 허리를 굽힌 채 조개를 캐고 있다. 사진 왼쪽 아래, 주민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는 저어새도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 2023년 5월 19일. ⓒ 정진오

 

인천 <인일철공소>에서 만든 홍합 따는 도구. 서해5도 쪽 해역에서 많이 쓴다고 했다(왼쪽). 2023년 5월 19일. 인천 <영흥민속대장간>에서 만든 홍합 따는 도구. 서해5도 쪽 어민들이 선호하는 장비라고 한다(오른쪽).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장봉도 아낙들이 손에 든 호미는 어디서 만들었을까. 지난해 연말, 장봉도 출신 최승길(60) 씨를 인천 중구 도원동 인일철공소에서 만난 적이 있다. "장봉도에 계시는 아흔 넘으신 아버지께서 낙지 잡는 걸 사 오라고 하셨다"면서 핸드폰에 저장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두 발 달린 낙지호미였다. 갯지렁이 잡는 두 발 호미를 장봉도 쪽에서는 낙지 잡는 데도 쓴다고 <인일철공소>의 송종화 장인은 이야기했다. 장봉도 아낙들이 들고 있던 호미도 분명 인천의 몇 안 남은 대장간에서 만든 것일 테다.

맨손어업에 쓰이는 도구들도 다양하다. 조새, 호미, 삽, 작살 등 여럿이다. 우리가 이 도구들을 사용한 것은 무척 오래되었을 텐데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처음에는 나뭇가지나 날카롭게 쪼갠 돌을 썼을 테고, 다음에는 동물의 뼈를 이용하다가 청동기나 쇠붙이로 넘어갔을 거다. 지금까지 드러난 유물 발굴 성과로 볼 때는 나무와 쇠가 결합한 '조새'가 가장 오래된 우리의 맨손어업 도구에 속한다.

12세기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도요지에서 청자를 싣고 가던 고려 선박이 완도 약사면 어두리 앞 해상에서 침몰했다. 학계에서는 이 배를 '완도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완도선에서는 도자기, 청동그릇, 국자, 솥, 목제망치 등과 함께 조새 2점이 나왔다. 뾰족한 쇠날은 없고 나무 자루인 환봉만 남아 있었다. 자로의 모양새가 요즘 조새의 그것과 비슷하다.

조새는 굴 따는 도구이다. 갯바위에 붙어 있는 굴을 따고 굴 껍데기를 까는 데 맞춤이다. 지역에 따라 '줴', '죄', '쪼새', '쪼시개', '갈고랑이', '구재' 등으로도 불린다. 조새는 둥근 방망이처럼 생긴 자루 머리에 양쪽 끝이 뾰족한 쇠날을 박는다. 자루 아래쪽 끝에는 뾰족한 철사를 박아넣고 끝을 'ㄴ'자 형으로 구부렸다. 요새는 굵은 손잡이 대신 손에 쥐기 편한 개량형 조새도 많이 쓴다.

완도선이 침몰했던 바로 그 시기인 1123년 중국 송나라의 서긍(徐兢. 1091~1153)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도경(高麗圖經)>이란 보고서를 만들어 송나라 왕에게 바쳤다. 거기에 12세기 고려 사람들의 생활상이 비교적 상세하다. 갯벌에서의 어패류 채취 상황도 적혀 있다.

"굴과 대합들은 조수가 빠져도 나가지 못하므로, 사람이 줍되 힘을 다하여 이를 주워도 없어지지 않는다." 썰물 때 굴과 대합들은 바다로 쓸려가지 못하고 갯벌 위에 드러나 사람들이 손쉽게 주울 수 있고,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아무리 주워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 나온다는 거다. 

중국인 입장에서 우리 갯벌의 풍성함을 무척이나 부러워하는 게 여실하다. 굴과 대합을 채취할 때 무슨 도구를 썼는지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완도선 발굴에서 드러났듯 이때 이미 고려에서는 지금 쓰는 조새와 엇비슷한 도구를 사용하고 있었다.

정약전 <자산어보>에 기록된 패류 채취 도구들
 

인천 <인일철공소>의 낙지 삽(왼쪽). 인천 <인일철공소>의 낙지호미. 날의 위쪽 볼이 넓게 퍼졌다가 날카롭게 뾰족해진 모양이다. 갯벌이 단단하고 깊은 곳에서 쓴다고 한다(오른쪽 위). 인천 <인일철공소>의 낙지호미. 호미 날의 볼이 좁은 편이다. 날이 급격히 굽어진 뒤 길게 뻗어 있다. 갯벌이 부드러운 곳에서 쓴다(오른쪽 가운데). 2023년 5월 19일. <영흥민속대장간>에서 만든 2발짜리 낙지호미와 날 하나짜리 낙지호미. 2발 낙지호미는 2발 쇠스랑 모양이다(오른쪽 아래).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인천 <인일철공소>에서 만든 바지락 호미. 호미 날이 날렵하다(왼쪽). 호미 날의 끝부분이 살짝 굵어졌다가 뾰족해지는 형태다. 그래서 끄트머리가 삼각 모양을 띤다(오른쪽). 2023년 5월 19일. ⓒ 정진오

 

인천 <인일철공소>의 두 발 호미. 강화에서 갯지렁이를 잡을 때 많이 쓴다고 한다. 물론 이걸로 낙지도 잡는다. 영흥민속대장간의 2발 호미와 비슷한 모양이다. 2023년 5월 19일. ⓒ 정진오


옛 자료 중에 해산물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전라남도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자산어보(玆山漁譜)>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 패류를 채취할 때 쓰는 도구가 어떤 것인지 대강이나마 기록했다. 

굴의 종류인 석화(石華)를 말하면서 '암석에 붙어 있어 쇠송곳(鐵錐)으로 채취한다'고 했고, 굴통굴(桶蠔)을 설명하면서는 '(조수가 밀려와 두 쪽의 껍데기가 열리면) 굴통굴을 따는 사람은 쇠송곳으로 급히 내려친다. 그러면 껍데기가 떨어지고 살이 남는다. 그 살을 칼로 떼어낸다. 만약 내려치기 전에 굴통굴이 먼저 알게 되면 차라리 부서질지언정 떨어지지 않는다'고 썼다.

정약전이 얘기한 쇠송곳, 즉 철추(鐵錐)의 구체적인 모양까지는 적혀 있지 않다. 내려친다고 했으니 자루에 뾰족한 쇠가 박힌 조새 같은 형태였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석화는 쇠송곳 하나만 갖고도 채취할 수 있었는데, 굴통굴을 따기 위해서는 쇠송곳과 칼, 이렇게 두 가지 도구를 함께 가져가야 했다.

정약전은 바윗돌에 딱 달라붙어 꿈쩍도 하지 않는 굴통굴의 성질을 일러 '차라리 부서질지언정 떨어지지 않는다(寧粉碎而不落)'고 표현했다. 정약전은 천주교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종교의 가치를 목숨과 바꾼 자신의 동생 정약종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꼿꼿함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을 정약전은 굴통굴의 모습에서 읽어냈을 것만 같다.

갯벌에서 조개나 낙지를 잡는 호미 같은 도구들도 그 모양이 지역마다 다르다. 호미 날이 길고 크기가 큰 거는 갯벌이 깊고 단단한 대부도나 제부도 같은 곳에서 쓰고, 호미 날의 볼이 좁은 거는 백령도나 대청도처럼 부드러운 갯벌에서 사용한다.

갈퀴처럼 생긴 동죽호미도 있다. 갯벌을 긁어서 그 속에 든 조개들을 파내는 도구이다. 이름이 동죽이라고 해서 동죽만 잡는 건 아니다. 갯벌에 야트막하게 들어가 있는 바지락 같은 조개류는 다 잡을 수 있다. 6발짜리도 있고, 4발짜리도 있다.

인천에는 동죽이나 바지락 같은 조개가 얼마나 많이 났던지 동네 이름이 '조갯골'이라고 부르던 곳도 있었다. 인천 연수구 옥련동 일대였다. 지금 수인선 송도역 부근이다. 이곳엔 조갯고개라는 길도 있었다. 이제는 다 아파트단지가 되어 조갯골이나 조갯고개는 옛말이 되었다.

인천 연수구 옥련동, 동춘동 부근의 갯벌이 얼마나 드넓었던지 그곳에만도 규모가 큰 어촌계가 여럿 있었다. 척전(尺前) 어촌계가 가장 컸고, 다음이 동막(東幕) 어촌계였다. 인천 옹진군의 유일한 대장간인 <영흥민속대장간>에서 만드는 동죽호미가 바로 이 동막 어촌계 주민들이 쓰던 갈퀴 호미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맨손어업 갯벌이던 인천 송도신도시 터 
 

<영흥민속대장간>의 동죽호미. 6발짜리와 4발짜리가 있다. 갈퀴 같이 생긴 이 호미로 갯벌을 긁어 조개를 캐낸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인천 <인일철공소>에서 만든 장어 잡는 작살이다. 모양이 특이하다. 지역에 따라서는 장어 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작살은 예전에 민물장어잡이에 많이 쓰였다. 요즘은 수요가 많지 않다. 2023년 5월 19일. ⓒ 정진오


인천의 송도신도시는 척전이나 동막의 주민들이 맨손어업을 하던 갯벌이었다.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는 송도가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이었다고 말하면, 믿기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던 송도신도시 기공식이 1994년 9월이었으니, 불과 30년 전만 해도 이 갯벌에서는 조개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영종도나 청라신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학박사 신태범(1912~2001)의 <인천 한 세기>에 보면, 인천 연수구 옥련동 쪽 송도 갯벌에서 잡은 조갯살이 중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동죽이나 가무락 같은 조개가 많이 잡혀서 차이나타운의 큰 상인들이 그걸 사들인 뒤 멸치처럼 데쳐서 말렸다. 그 말린 조갯살을 새우살, 해삼, 전복과 함께 중국에 수출했다는 거다. 이 차이나타운의 상인들이 있는 통에 전국의 말린 해산물은 죄다 인천으로 몰려드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고 신태범 박사는 전한다.

인천 <인일철공소>에 가면 도로 옆 상품 진열대에서 아주 특별하게 생긴 철물을 볼 수 있다. 그걸 처음 보았을 때 문득 해마(海馬)가 떠올랐다. 머리를 숙이고 앞가슴을 내민 모양이 마치 해마처럼 보였다. '장어 작살'이라고 했다. 다른 곳에서는 '장어 칼'이라고도 하고 '장어 갈퀴'라고도 했다.

휘어 있는 삼지창처럼 생긴 부분이 장어를 꿰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인일철공소>에서는 그 삼지창의 가운데 두 가닥 뾰족한 침은 특별히 황동 용접을 해서 떨어지지 않게 한다. 자동차 판스프링으로 만드는 이 작살은 길이가 1m 가까이 되는데, 여기에 작살 길이보다 긴 1m50cm 정도 되는 대나무로 자루를 만든다. 

<인일철공소>의 장어 작살에는 자루 박는 아랫부분에 홈이 여러 개 나 있다. 그곳을 철사로 동여서 자루가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다른 지역에서는 나무로 자루를 만들기도 한다.

장어 작살이 인일철공소의 효자 품목일 때가 있었다. 인일철공소의 장어 작살은 주로 민물장어잡이에 사용했다. 예전에는 민물장어를 잡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저수지 같은 곳에서 튜브를 타고 장어 작살로 장어를 잡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 살림을 하고 남을 정도로 장어잡이가 잘 되었다. 

그때는 장어 작살 1개에 장어 1관(貫) 값을 받았다. 1관은 3.75kg이다.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지금은 사는 사람이 없어 만들 일도 많지 않다. 요새는 6만 원을 받는다.

'뻘보다 바지락이 많다'던 선재도 갯벌
 

굵은 쇠 막대기로 만든 키조개 채취하는 갈고리다. 잠수부들이 이 갈고리를 갖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작업을 한다. 작업자들은 이 갈고리를 고마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바닥에 놓고 보니 '7'자 모양으로 생겼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영흥민속대장간>에서 만든 개량형 조새. 호남지방 갯벌 작업에서 많이 쓰는 형태라고 이규산 장인은 말했다(위).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굴 채취 도구로 써 온 조새. 고려시대 바다에 침몰했던 선박 완도선에서 발굴된 2개의 조새 손잡이도 이런 모양이었다. <영흥민속대장간> 이규산 장인 작품이다(아래).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인천 옹진군 영흥면 선재도와 경기 안산의 대부도 갯벌에는 바지락이 그렇게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선재도 갯벌은 '뻘보다 바지락이 많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곳은 바지락 생산량 전국 최고를 자랑했다. 

지금도 바지락이 많이 잡히는 편이다. 지난 5월 17일 영흥민속대장간에는 바지락 채취 초보라는 여성이 여러 개의 호미 수리를 맡기러 왔다. 이날 오전 3시간 동안 바지락 21kg을 잡아 어촌계에 넘겼다고 했다. 1kg당 2천900원이라고 했다.

마침 그때 다른 여성 1명이 대장간을 지나쳤다. 나이가 지긋한 이 여성은 오전에만 낙지 30마리를 잡았다고 했다. 낙지 잘 잡기로 영흥에서도 소문이 났다고 한다. 이 여성은 낙지를 잡아 자식 다 키우고 재산까지 늘렸다고 한다.

<영흥민속대장간> 이규산 장인은 바닷속에 잠수해야 잡을 수 있는 키조개 갈고리도 만든다. 굵은 쇠 막대기를 아라비아숫자 '7'자 형태로 꺾어 만든다. 손잡이 쪽은 둥그렇지만 키조개를 캐내는 끄트머리는 뾰족하다. 키조개 잡는 사람들은 '고마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전라도에서도, 충청도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 키조개는 바다 밑에 서식해 잠수하지 않으면 잡을 수가 없다. 인천에는 덕적도 해상에 키조개가 많고, 경기도는 풍도나 화성 앞바다가 많다. 키조개 잡는 구역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온갖 오염물질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갯벌과 바다는 그래도 잘 버티고 있다. 문제는 도구에 있다. 우리의 맨손어업 도구를 만들어낼 대장간이 문을 닫게 되면 그 도구는 어디에서 날 것인가. 정부는 오랜 전통의 갯벌어로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겠다고 나섰건만 정작 갯벌어로의 도구는 우리 어민들의 손에 맞지도 않는 중국산을 써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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