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노을의 마지막 잔상이 서쪽 하늘의 끝자락으로 넘어가고 내게 다가오는 것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혹은 늑대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마치 쉬폰 같은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어스름의 끝에 '1001 M.U.N'이라는 네온 간판이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 문으로 가벼운 풍경 소리와 함께 들어섰다.
나의 모습을 본 순간,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려 손님을 맞으려던 주인장의 얼굴이 그 미소와 함께 그대로 얼어 붙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약간 우스운 기분과 장난 좀 쳐볼까 하는 짓궂은 마음이 함께 들었지만, 참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그는 아직도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저녁 날씨가 꽤 쌀쌀하네요. 올 겨울은 꽤나 추울 건가 봐요."
그가 목이라도 졸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은… 손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일전에 그러셨죠. 이탈리아 친구분들이 여기 왔었다고… 현실 속에 그런 손님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어느 날 제가 꿈 속에서 봤던 단테와 마키아벨리뿐이란 말입니다!"
"예, 저한테도 얘기하셨죠. 그 꿈 얘기."
"하지만 당신은 그들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지금 이게 제 또 다른 꿈인가요?"
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전 그냥 저니까요. 나름 사연은 있지만, 지금은 그 얘길 다 할 때는 아닌 것 같군요. 아무튼 그렇게 귀신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지만 마시고 와인이나 주세요."
그는 여전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한숨과 함께 머리를 흔들며 이윽고 두 병의 와인을 들고 왔다. 그가 들고 온 와인병들을 보는 순간 나는 폭소를 터트렸다. 한 병에는 천사의 모습이, 다른 한 병에는 악마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하하하, 사장님. 지금 제가 천사인지, 악마인지 시험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그럼 안주는 흡혈귀인지 알아보게 마늘 잔뜩 넣은 파스타라도 주실 건가요? 전 어느 쪽도 아니니 이렇게 떠보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맛있는 와인 주세요."
내 말에 그는 좀 멋쩍어 하면서 그제서야 표정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요 근래 제가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좀 많아서요."
"이해합니다. 그나저나 가져오신 김에 설명이나 좀 해주세요. 이 와인들은 무슨 와인들이길래 이렇게 라벨에 천사와 악마를 그려 넣은 건가요?"
"이쪽 천사가 그려진 와인은 칠레의 대형 와인 업체인 비냐 몬테스(Viña Montes)의 '몬테스 알파(Montes Alpha)'입니다. 비냐 몬테스 와이너리는 1987년에 아우렐리오 몬테스와 더글러스 머레이가 동업으로 세운 와이너리에서 시작됩니다. 나중에 또 다른 전문가인 알프레도 비다우레가 합류하면서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와인 업체의 기초가 닦였죠. 세 명의 창업주 중에서도 더글러스 머레이는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와 사고를 자주 당하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해요. 그런데도 무사히 살아남은 건 자신을 지켜주는 천사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몬테스 브랜드로 생산되는 와인들에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천사를 새기게 되죠."
"그렇군요. 그런 경우라면 확실히 천사의 가호가 있었던 것 같네요. 이쪽의 악마 그림은요?"
"그 와인은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방의 샤토 드 칼비에르(Chateau de Calvieres)에서 만드는 '말리뇨(Maligno)'라는 와인입니다. 말리뇨는 말 그대로 악마를 뜻하는데요. 중세인 14세기에 유럽 전역을 흑사병이 덮쳐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프랑스 남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이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레드와인이 원래 천사가 악마를 병 안에 가둔 술이라는 설화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악마가 그려진 와인병을 주고 받으면 흑사병을 퍼뜨리는 악마가 두려워서 피해갈 거라는 믿음을 가졌던 거죠. 샤토의 오너인 마르 헤농(Marc Henon)은 이런 남프랑스의 전통과 토양을 잘 이어받은 와인을 만드는데 그게 바로 이 말리뇨입니다."
▲ 라벨에 천사가 그려진 칠레 비냐 몬테스(Vina Montes)의 '몬테스 알파(Montes Alpha)'와 악마가 그려진 프랑스 샤토 드 깔비에르(Chateau de Calvieres)의 '말리뇨(Maligno)'. 몬테스 알파 라벨의 천사는 몬테스 와이너리의 상징이며, 말리뇨의 악마는 14세기 흑사병이 유행할 때 사람들이 악마를 와인병 안에 가둔다는 의미로 주고받던 부적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이건수
"그렇군요. 재미있네요. 근데 전 왠지 둘 다 지금 바로 마시고 싶은 느낌은 아닌데요. 다른 와인은 없나요?"
그는 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두 병의 와인을 치우고는 다른 와인 한 병을 가져왔다. 거친 듯한 사람의 손과 그 위에 놓여진 포도 송이가 그려진 라벨이었다. 그는 다른 때처럼 코르크 마개를 여는 대신 와인병 입구를 가볍게 비틀었다. 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음료수병 같은 마개가 열렸다. 흥미로운 내 눈길을 느꼈는지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트위스트 캡이라는 겁니다. 코르크 마개는 전통적이고 와인 보관에 널리 쓰이긴 했지만,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고 유통과정에서 오염되어 와인까지도 상하게 할 우려가 있는 데다 열고 닫기도 어렵죠. 그에 비해서 이 트위스트 캡은 값이 싸면서도 코르크 마개 못지 않은 기밀성을 유지해주는 데다 한 번 열었던 와인도 다시 닫아서 보관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면을 중시하는 신세계의 생산자들이 애호하는 편입니다. 예전에는 값싼 와인에만 이 트위스트 캡을 썼지만 지금은 이 캡의 장점에 눈 뜬 호주의 생산자들을 중심으로 고급 와인에도 많이 사용하고 있지요."
그가 두 잔의 와인을 따르고 그 중 한 잔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를 한 후 와인잔을 기울여 향을 맡아 보았다. 짙은 말린 자두의 향, 그리고 딸기 같은 과일향이 훅 덮쳐왔다. 다시 잔을 테이블에 내려 놓고 살짝 돌려 공기와 접촉시킨 후에 잔을 들어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혀 위에 매끄럽게 깔리는 느낌과 함께 마치 초콜릿을 물고 있는 것 같은 달달한 느낌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오, 아주 맛있는데요. 과일향과 초콜릿향도 풍부하고, 뭐랄까 아주 진하고 매끄러운 느낌이에요. 마신 다음에 여운도 길고, 아주 희미하지만 끝에 옅은 후추 같은 느낌도 있네요."
"이 와인은 호주의 대표 포도 품종인 쉬라즈로 만든 투핸즈 엔젤스쉐어(Two Hands Angels' Share)라는 와인입니다. 쉬라즈는 그야말로 호주의 상징 같은 품종인데 지금 말씀하신 모든 향기와 맛, 느낌이 바로 쉬라즈의 특징이죠. 프랑스 보르도의 핵심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이 요즘 속어로 차도남, 차가운 도시 남자 같은 느낌이라면, 이 쉬라즈는 푸근한 시골 아저씨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좀 더 편안하게 접할 수 있죠. 그런데 대체 누구십니까? 정체가 뭐죠?"
"이 라벨의 손그림은 뭐죠? 와인 만든 사람의 손인가요?"
"예, 투핸즈 와이너리의 역사는 1999년에 절친이었던 전직 건축업자 마이클 트웰프트리(Michael Twelftree)와 오크통 제조업자인 리차드 민츠(Richard Mintz)가 그 전까지 심심풀이로 만들곤 했던 와인을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와인으로 만들어보자며 시작됩니다. 이 와이너리의 상징인 두 개의 손(two hands)은 바로 이 두 창업자가 서로 한 손씩 모아 그 목표를 이루어보자는 결의에서 유래된 거구요.
그로부터 근 20년 간에 걸친 노력 끝에 투핸즈는 호주에서도 가장 주목 받는 와인 생산자가 됐습니다. 심지어 세계적인 유명 와인평론가인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가 이들을 일컬어 '남반구 최고의 와인 생산자(the finest negociant south of the equator)'라고 극찬을 하기도 했었죠.
투핸즈에는 다양한 시리즈의 와인들이 있는데 지금 드린 이 엔젤스쉐어는 그 중에서도 픽처 시리즈(picture series)이자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투핸즈 와인이기도 합니다. 픽처 시리즈는 두 창업자의 친구인 사진작가 돈 브라이스(Don Brice)의 폴라로이드 작품을 라벨로 만든 와인들이죠.
엔젤스쉐어라는 건 와인이나 증류주를 오크통에 숙성시키면 오크통의 미세한 기공을 타고 술의 알코올 성분이 증발되면서 양이 줄어드는데, 이런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중세에는 그 줄어드는 양이 술을 지켜주는 천사가 마신 것이라고 생각해서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이 술의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한 거구요."
"역시 사장님의 와인 설명은 맛깔지네요. 덩달아 술 맛도 더 좋아지는 거 같아요."
▲ 1999년 창립 당시의 투핸즈 와이너리 전경. 투핸즈는 친구였던 마이클 트웰프트리(Michael Twelftree)와 리차드 민츠(Richard Mintz)가 호주의 쉬라즈로 세계적인 와인을 만들어보자고 의기 투합하여 만들었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이들을 일컬어 '남반부 최고의 와인 생산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 Twohandswines.com
▲ 투핸즈 창업자들의 친구이자 사진작가인 돈 브라이스의 폴라로이드 작품을 라벨로 만든 픽처(Picture) 시리즈. 엔젤스쉐어는 오크통 숙성 시 기화로 줄어드는 와인을 천사의 몫이라 생각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투핸즈 와인의 베스트 셀러 중 하나이다. ⓒ Twohandswines.com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제 질문에는 답을 안 하셨어요. 손님은 대체 누구시죠? 전 여태 꿈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가게에 찾아온 단테와 마키아벨리를 만난 것도 그렇고, 갑자기 꿈인지 생시인지 중세 보르도에서 포도나무 나르던 수도사가 됐던 것도 그렇고, 그 모든 것이 손님이 하신 일이란 말인가요? 천사도 악마도 아니시라면, 대체 누구십니까?"
그는 와인 잔을 내려놓고 어느새 내 얼굴을 꿰뚫기라도 할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더 이상 두려운 빛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와인 잔을 돌린 후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진하고 풍부한 과실의 향기와 맛이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나는 잔을 테이블에 올려 놓고 조용히 그를 마주 보았다.
"글쎄요. 지금 이 시점에 내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군요. 사실 그대는 이미 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옛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 가게에 나타났던 것도, 중세의 수도사가 되어 옛 프랑스 땅에 갔던 것도, 내가 한 일이라기 보다는 그대 자신이 원했던 일이기에 가능했습니다. 나는 그저 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도움을 줬을 뿐이구요. 뭣보다 지금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누구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뭘 갈구하고 있느냐일 듯하군요."
"나 자신이 뭘 원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구요?"
"그렇습니다. 그대가 좋아하는 단테처럼, 어찌 보면 그대는 지금 인생의 중반에서 길을 잃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신곡에 나오는 베르길리우스가 아니지만 적어도 그대 곁에서 길을 찾는 데 작은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가 생각을 하는 동안 혼자 조용히 와인을 즐겼다. 문득 그에게서 예전의 내 자신을 보았다. 지식에 대한 끝없는 갈증과 추구, 그러나 그 지식을 제대로 펼칠 수 없던 답답한 현실. 그 현실을 온 몸으로 바꾸고 싶었던 야심과 내 뜻을 끝까지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사이에서 느꼈던 혼란. 그 모든 모순적 감정의 소용돌이들.
이윽고 그가 머리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처음보다 많이 맑고 차분해져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누군지, 내가 지금 왜 이런 일들을 겪고 있는지. 그러나 겪어야 한다면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 그걸 피하거나 도망가지는 않겠습니다. 자, 말씀해주세요. 제가 뭘 하면 되죠?"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눈높이로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그가 내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천사는 이 와인에서 이미 자기 몫을 가져 갔을까?
"글쎄요, 그 질문은 내가 드리고 싶군요. 뭘 하고 싶으시죠? 적어도 지금까지 그대는 내게 와인이라는 술을 소개했습니다. 나는 백지장 같은 존재입니다. 그대가 내게 와인을 소개하고 함께 마셨을 때는 아마 와인으로 시작되는 그 무언가를 그대 스스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난 그 과정에서 그대가 보고자 하는 것, 듣고 싶은 일들을 도울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그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그런가요? 그럼 지금은 우선 이 술부터 마저 마시면서 생각해봐야겠군요. 와인이라… 와인…"
우리는 다시 가볍게 건배를 했고, 술기운이 오르면서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스스럼 없이 웃고 마셨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치면서 탄성을 뱉었다.
"맞아요!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시죠?"
어느새 내 말투는 다시 젊은 손님의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젊은이가 되는 건 늘 즐겁다.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대가 누군지. 아뇨,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대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자신이 누군지 다 얘기하셨군요."
"하하하, 아셨나요? 그럼 제가 누구죠?"
"당신은 바로…."
(* 1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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