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종배추는 결구(結球, 채소 잎이 여러 겹으로 겹쳐서 둥글게 속이 드는 일)를 하지 않는다. ⓒ 김진영
훈련원이 있던 서울 종로구 충신동, 사라진 동대문운동장 근처의 효제동, 지금의 종로5가는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배추가 나던 동네다. 그 가운데 훈련원이 있던 방아다리 느리골 배추를 최고로 쳤다고 한다.
1920년대 배추와 지금의 배추는 아주 달랐다. 그 당시 최고로 치던 방아다리 배추는 경성배추다. 서울 위로는 개성배추를 재배했다. 둘 다 토종배추다. 임오군란 이후 중국인들이 집단 이주를 시작하면서 산동지역 배추를 비롯해 여러 곳의 중국 배추도 같이 들어왔다.
중국에서 들어온 배추를 호떡이라고 부르듯 호배추라고 불렀다. 호배추와 토종배추(경성·개성 배추)는 우선 외형부터 달랐다. 토종배추는 결구(結球, 채소 잎이 여러 겹으로 겹쳐서 둥글게 속이 드는 일)를 하지 않지만 호배추는 결구가 된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토종배추'가 밀려났다
▲ 충남 예산의 조그만 언덕에 토종배추가 있었다. 토종배추의 일종인 '구억배추'다. 제주도 한경면 구억리의 할머니 한 분이 소중히 보존했던 배추다. ⓒ 김진영
호배추가 들어와도 토종배추의 입지는 탄탄했다. 호배추보다 감칠맛이나 씹는 맛이 좋거니와 익숙한 맛이라 새로운 맛인 호배추가 쉽게 밀고 들어오지 못했다. 포기당 무게 차이도 크게 나기에 맛을 떠나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는 수확량이 좋은 호배추를 장려했다.
기온이 갑자기 낮아져 배추가 얼면 호배추는 겉잎을 떼어내면 그만이지만, 토종배추는 통으로 버려야 했다. 토종배추는 수확량과 추위에 약해 점차적으로 호배추에 밀렸다. 주영하 교수가 쓴 <식탁 위의 한국사>에 따르면, 토종배추와 호배추가 1970년대까지는 공존하다가 1980년대 들어서면서 토종배추가 완전히 밀려났다고 한다.
토종배추와 호배추는 절이는 방법도 달랐다고 한다. 속이 꽉 찬 호배추는 소금물에 절이고, 속이 차지 않는 토종배추는 소금을 뿌리는 방법으로 절였다고 한다. 다른 조리법에는 김장할 때 속을 무치면서 같이 소금을 뿌려도 된다고 할 정도로 아주 달랐다. 1980년대 호배추가 시장을 지배하면서 '호'자를 떼고 배추라고 불렀다. 지금은 중국산 배추김치도 많이 수입하고 있지만, 실상 우리가 먹고 있는 배추의 고향은 중국이었다.
배추 산지를 여러 곳 다녔지만 토종배추의 존재를 몰랐다. 닭과 돼지의 품종과 토종에 대한 고민은 했어도 배추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옛 기억을 더듬어보면 늦가을에 출장 갔을 때 결구하지 않은 배추를 본 기억은 있다. 그때 당시에는 참 성의없이 배추 농사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결구가 잘 되어 한 포기 2kg 이상 나가야 제대로 농사를 지은 배추 취급을 했기 때문이다.
토종배추를 찾다가 SBS <폼나게 먹자> 촬영하면서 충남 예산에서 삭힌 김치로 만났다. 삭힌 김치는 김치를 담가서 5개월 정도 숙성한다. 김장김치 담그는 것과 방법은 같지만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담근다. 깨진 독에 김치를 담고 위 아래로 잘 숙성되도록 한 다음 이듬해 3월부터 먹는다. 삭힐 때 깨진 틈 사이로 물기가 빠진다. 물기가 고여 있으면 아삭하게 삭지 않고 물러진다.
들깻가루를 푼 된장국에 삭힌 김치를 넣고 한소끔 끓이면 요리가 된다. 삭힌 김치는 '홍어 김치'로도 알려졌지만 사실 홍어 맛은 안 난다. 겉보기에는 물러있을 것 같은 외형이지만 씹으면 아삭하다.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산뜻한 발효 향이 난다. 삭힌 김치를 먹어봤던 외국인이 치즈 맛이 난다고 했던 게 이해가 됐다. 전에 먹어왔던 배추김치와 다른 식감과 맛이다.
구억배추로 담근 충남 예산의 '삭힌 김치'
▲ 토종배추를 찾다가 SBS <폼나게 먹자> 촬영하면서 충남 예산에서 삭힌 김치로 만났다. 삭힌 김치는 김치를 담가서 5개월 정도 숙성한다. 김장김치 담그는 것과 방법은 같지만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담근다. 깨진 독에 김치를 담고 위 아래로 잘 숙성되도록 한 다음 이듬해 3월부터 먹는다. 삭힐 때 깨진 틈 사이로 물기가 빠진다. 물기가 고여 있으면 아삭하게 삭지 않고 물러진다. ⓒ 김진영
삭힌 김치로 토종배추 맛을 봤더니 날 것의 배추 맛이 궁금해졌다. 글로만 봤던 쌉싸름한 맛과 감칠맛이 궁금했다. 10월에 예산의 삭인 김치 생산자와 통화하니 11월 중순 지나서 오면 된다고 했다. 날짜만 꼽고 있다가 얼마 전에 다녀왔다. 예산의 조그만 언덕에 토종배추가 있었다. 토종배추의 일종인 '구억배추'다. 제주도 한경면 구억리의 할머니 한 분이 소중히 보존했던 배추다. 알음알음 재배하던 구억배추는 현재 여러 군데에서 소규모로 재배하고 있다.
익히 알고 있던 배추와는 달리 꽃처럼 보였다. 겉잎은 꽃대에 붙은 잎사귀처럼, 가운데는 꽃망울처럼 보였다. 반을 가르면 겉과 달리 노란 속 빛을 보이던 배추와 달랐다. 겉과 속이 같은 색이다. 보자마자 손을 뻗어 속잎을 뜯어 입으로 넣었다. 쌉싸름한 맛이 먼저 오고 천천히 단맛이 뒤를 따랐다. 수분은 여느 배추처럼 많지 않지만 아삭했다. 갓과 배추를 함께 씹는 맛이다. 상당히 매력적인 향과 맛이다.
배춧잎을 몇 장 더 뜯어 먹다보니 고춧가루 넣고 만든 김치 맛이 궁금해졌고, 냉면 생각이 났다. 1920년대 종로통에서 냉면 김치로 개성배추나 훈련원 근처에서 재배한 경성배추로 담근 김치가 나왔을 것이다. 아침 해장국으로 먹던 선짓국의 우거지 또한 그 배추였을 것이다. 고소한 선지와 제법 어울렸을 듯 싶다.
김장이 얼추 끝나는 시기다. 해마다 김장하는 집도 적어지고 담그는 양도 적어진다. 내년에는 별미로 토종배추 김치를 담가보는 것도 좋겠다. 맛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 정상이지만, 토종배추는 사라져서는 안 될 맛이다. 토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먹자는 게 아니다. 진짜 맛있는 배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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