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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라는 이름의 흑백 사진첩

고향에 벌초하러 가다

등록|2007.09.02 08:45 수정|2007.09.02 13:36
해마다 한 번씩 고향에 풀 베러 간다. 얼굴도 모르는 고조, 증조 어른들이지만, 이제는 화장 모시고 벌초할 묘도 몇 없어, 사촌들이 예초기로 전날 말끔히 풀 베어 놓은 묘에 빈 얼굴 들고 건성으로 모인다.

▲ 남한강 신원리 강마을 풍경 ⓒ 이형덕


왜 그리 이맘때만 되면 공연히 바빠지는지, 마지못해 가는 고향길이다. 길을 메우며 고향을 찾는 이 차들도 오래지 않아 한산해질 것이다. 아침 안개에 싸인 남한강의 강마을이 고향집처럼 아스름하다.

▲ 고향 담장의 호박 ⓒ 이형덕


고향은 언제나 흑백으로 남는다. 마편초 곱게 피고, 담장에 노란 호박꽃이 활짝 피었건만 눈 감고 그려보는 고향은 언제나 흑백사진이다.

▲ 마편초 ⓒ 이형덕


▲ 이웃집 꽃밭 ⓒ 이형덕


곱게 마루에 앉던 새집 할머니는 흙이 된 지 오래고, 새 주인이 된 이가 대신 가꾼 꽃밭이 어여쁘다. 고향에서는 곱고 예쁜 것도 슬프다. 등 돌리고 떠날 때 차마 두고 가기 가슴 아플까? 너무 곱고 예쁜 것도 슬프게 보인다.

▲ 고향의 농막 ⓒ 이형덕


어른들 몰래 담배를 배우던 때, 수북이 자라던 담배 밭이 있고, 건조실이 있던 밭에는 요새 금 좋다는 배추가 심겨지고, 원두막도 아니고, 비료 부대나 담아 두는 농막 뒤로 새로 지은 아파트가 낯설기만 하다.

▲ 고향집 담벼락 ⓒ 이형덕


▲ 추녀 밑의 마늘 ⓒ 이형덕


추녀에 매단 갈퀴며, 쇠스랑이며 여름마다 강으로 나가 번쩍거리는 고기들을 건져 올리던 그물이며, 중풍으로 쓰러진 숙부를 뵈면 더욱 서글퍼지는데 사촌이 부지런히 쌓아놓은 나뭇단들이 조금은 따스하다.

▲ 담장 밑의 땔감 ⓒ 이형덕


이제 제비도 오지 않는 추녀 밑에는 빈 제비집만 덩그러니 매달려 있고, 오랜 산자(散子) 흙이 지나는 바람도 없이 세월처럼 흘러내린다. 

▲ 빈 제비집 ⓒ 이형덕


모처럼 모인 어른들이 내 눈에도 아직 선한 할아버지를 면례(緬禮)할 이야기를 나누는 걸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듣는다. 물이 나는 묘라서 화장 모신다는데, 친척들 꿈속에서 말없이 나타난다는 우리 할아버지 묘마저 없어져 바람에 삭은 재 둔덕에 뿌리고 나면 고추밭이 되고, 마늘밭 되겠지.

▲ 고향의 어른들 ⓒ 이형덕


더 이상 벌초 날이 되어도 나는 이제는 공연히 바쁜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마지못해 고향을 찾지도 않겠지.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추후 '남양주뉴스'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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