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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무협소설 <천지> 264회

등록|2007.09.03 08:16 수정|2007.09.03 09:33
하지만 이미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좌화(坐化)에 들어가기 직전. 그러자 지광이 각원선사의 오른손을 잡았다.

“소....림은.... 향후 십....년 간......봉문(封門)하....라....... 지광.....너는 반드시.....이 말을... 방장께...전해야 한.....다.”

억지로 짜내어 하는 미세한 목소리였지만 장내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각원선사의 꺼져가는 얼굴에 후회와 체념의 기색이 역력했다.

“모...든.... 것은 업보(業報)인..... 것....을...... 소림은..... 그 동안도 여전히.....나태했다....... 후욱---”

숨이 막히는지 각원선사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기침과 함께 다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개(開)... 달마(達磨).....”

마지막 말이었다. 달마를 열라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이미 암흑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능효봉이 있는 곳이었다. 능효봉은 약간 입술을 일그러뜨렸지만 냉정한 시선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제 만천하에 자신이 구룡의 후예임을 알린 셈이었다. 이후로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허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본래 내일이면 밝혀질 일이었고, 이제는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었다.

또한 천룡인의 출현을 알릴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한 공포심을 심어주어야 한다. 어쭙지않게 사정을 봐주면 안 된다. 어떤 인물들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절대적인 존재로 보여야 한다. 그것의 첫 번째 희생자가 각원선사였을 뿐이다.

다만 마지막까지 제자를 지켜주려 한 각원선사의 마음만은 능효봉도 이해 할 것도 같았다. 경솔하게 지광이 자신의 죽음으로 인하여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능효봉에게 덤벼들 것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자신의 말을 전하라고 당부한 것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구나 십년 봉문 운운은 바로 그것. 구룡의 후예가 출현함으로서 앞으로의 무림은 혼란상태에 빠질 것이며, 성급히 소림이 나선다면 이미 사라진 세 개의 문파와 같은 운명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의미와 함께 그러한 사실을 전할 수 있도록 지광을 살려달라는 부탁에 다름이 아니었다.

마지막 달마를 열라는 말은 정말 중요한 말일 것이다. 천년 소림의 마지막 남은 무언가를 열라는 뜻이었을 터이니 십년의 봉문을 끝낸 소림의 또 다른 모습이 될 것 터였다. 어쩌면 각원선사는 자신의 죽음으로 소림을 각성시키고, 절치부심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을지 몰랐다.

“아미타불.....아미타불......”

지광이 쉴 새 없이 불호를 외었다. 사부의 극락왕생을 비는 것인지, 자신의 치밀어 오르는 자신의 노화를 참기 위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허나 사부를 끌어안고 한동안 불호를 외우던 지광이 고개를 들고 능효봉을 바라보았을 때 지광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부님의 시신을 처소로 옮겨도 되겠소?”

이미 사부의 뜻을 알아들었다. 자신은 살아 돌아가야 한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사부의 유명(遺命)을 전하고 다시는 이런 치욕을 받지 않도록 노력 정진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과 달리 지광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했다.

능효봉이 고개를 끄떡였다. 아마 소림은 저 지광으로 하여 다시 옛 면목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감정을 제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능효봉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락한다.”

반말이었다. 이미 천룡의 후예임을 밝힌 이상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누구를 막론하고 오시(傲視)할 수 있어야 한다. 지광은 아무 말 없이 사부의 시신을 안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번쯤은 사부를 충동질해 나서게 했던 화산의 자하진인에게 원망의 눈길을 던졌을 법도 하건만 그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아래로 향해 땅만 보면서 그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지금이라도 당장 운중보를 떠나고 싶건만 이미 운중선이 정박해 내일 오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능효봉이 장내를 쭉 훑어보았다. 서리가 내린 듯 주위는 고요했다. 그리고 어느새 모습을 보였는지 문 앞에는 백도와 회운사태를 업은 설중행이 서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발견한 자하진인과 화산의 인물들은 얼굴색이 홱 변했다.

“남궁공자라 했던가? 한 가지 부탁을 해야겠군.”
“말씀하시오.”

강한 자다. 남궁정은 강한 자를 좋아한다. 비록 나중에 적이 된다한들 어떠랴! 그래서 별로 말이 없는 그가 선뜻 응했다.

“이 시각 이후로 이곳을 벗어나려는 자가 있다면 무조건 죽이게. 가능하겠나?”
남궁정이 씨익 웃었다. 웃는데 익숙하지 않는 그라서 웃는 모습은 매우 이상하게 보였다.
“알겠소. 이곳을 벗어나려는 자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이오.”
그 말은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능효봉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흘렀다.
“좋아...... 대답이 마음에 드는군.”

가느다랗게 매달린 미소가 흡족한 미소로 변했다. 능효봉은 시선을 돌려 문 앞에서 막 회운사태를 백도가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히려는 설중행을 보았다.

“용서하거라.... 용서는 자비(慈悲)로부터 시작되고 자비는 곧 부처의 마음이니.......”

회운사태가 나직한 목소리로 계속 설중행을 달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설중행의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반드시 손에 피를 묻히겠다는 모습이었다. 허나 이미 각원선사가 유명을 달리했다. 더 이상 피를 보는 것은 불자로서 바라는 바가 아니다.

“용서할 수 없습니다. 소질에게는 자비란 것이 사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회운사태는 설중행의 손을 잡았지만 이미 설중행의 시선은 화산의 자하진인에게 꽂혀있었다. 그 시선을 받은 자하진인은 설중행과 회운사태를 번갈아 보고 있었지만 이미 얼굴에는 절망과 낭패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회운사태의 손이 스르륵 설중행의 손을 놓쳤다. 설중행은 잠시 회운사태를 보았다가 죄송스럽다는 시선을 던진 후 장내로 걸어 나왔다.

“이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나? 늙은 원숭이....!”

이빨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은 몸서리칠 만큼 살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이렇듯 무림 예의를 시궁창에 처박듯 막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또 다시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노기가 충천했다. 좌등이나 삼합회의 인물들마저 얼굴색이 변할 정도였다.

“저 어린놈이...어디 감히...!”

화산사검이 저 마다 노화를 터트렸지만 설중행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며 냉랭한 음성을 발했다.

“죽고 싶다면 모두 같이 덤벼도 좋다. 어차피 네놈들을 살려 보낼 생각은 없으니까....”

화산을 아예 깔보는 말투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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