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은 안중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연해주-동북3성 답사기 9] 안중근과 731부대의 도시, 할빈을 가다
▲ 아무르강을 거슬러 중국으로 넘어가다. 하바롭스크에서 한 시간 남짓 배를 타고 가면 중국의 변방도시 푸위엔에 닿습니다. 저 건너편으로 보이는 곳이 중국입니다. ⓒ 서부원
쾌속선을 타고 아무르강을 한 시간 남짓 거슬러 올라가니,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세상에 온 듯 분위기가 영 딴판입니다. 강을 유람하듯 배에 올랐을 뿐인데 어느새 낯익은 한자 간판이 이곳저곳 눈에 띕니다. 배가 닿은 곳은 중국의 동북방 변경 도시인 푸위엔입니다.
세관원이 의심의 눈초리로 짐을 뒤적이며 여행 목적을 묻고 또 묻는 통에 통관에 적잖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마도 러시아에서 이 곳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오는 외국 관광객이 적은 탓일 겁니다.
이제 낡은 소형 버스를 옮겨 타고 열 몇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야 합니다. 변경 도시 이곳 푸위엔에서 목적지인 할빈까지의 거리가 자그마치 1000㎞가 넘기 때문입니다. 힘이야 들겠지만 드넓은 만주땅(동북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가슴 벅찬 대장정이 될 것입니다.
땅 한 뙈기도 내버려두지 않는 중국의 힘
쑹화쟝이 아무르강에 합류하는 뚱쟝 시내를 지나니 시원하게 뚫린 4차선 고속도로를 만납니다. 도로 양 옆으로 옥수수와 콩을 심은 밭이 지평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파종부터 수확까지 오로지 이 곳 주민들이 손으로 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드넓은 평원이야 러시아에서 익히 봐온 터이지만, 이곳 중국에서는 땅 한 뙈기조차 그냥 내버려두지 않은 경작지였습니다. 웬만한 어른 키보다 웃자란 옥수수가 푸른 하늘과 맞닿을 만큼 넓게 펼쳐진 '곡물의 바다'를 바라보며 중국의 무시무시한 힘을 느끼게 됩니다.
러시아를 벗어나 중국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할빈 속의 러시아, 성소피아 성당의 모습할빈이 러시아의 동만철도 개통과 함께 건설되었음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다. ⓒ 서부원
할빈은 헤이룽쟝성의 수도로서 인구 400만명(2004년 기준)이 넘는 거대 도시이지만,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가 바이칼호 동쪽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기 위해 만주를 관통하는 동만 철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도시입니다.
남북 방향으로 동만 철도가 놓이고, 동서로는 내륙 수로인 쑹화쟝이 교차하고 있어 천혜의 교통 요지로서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는데, 주목을 받게 된 만큼 할빈이 겪은 역사적 상처 또한 컸습니다.
청나라의 발상지였지만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각축 속에 러시아가 조차했고,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의 일시적인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9·18사변(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의 대륙 침략의 전초 기지로 쓰이다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소련군에 1년간 점령당하게 됩니다. 1년 뒤 중국 공산군이 탈환해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동북아 근현대사의 산증인과도 같은 도시입니다.
그러다 보니 국적을 넘나드는 역사의 흔적을 통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일본·러시아 등 네 나라가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서 격동의 근현대사를 공유하며 이 곳 할빈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내 중심가에 서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소피아 성당은 이 곳에 동만 철도가 지나고 러시아인들이 대거 이주해오면서 세워진 할빈의 '러시아식' 랜드마크입니다.
지금은 건물 외양을 제외하고는 종교적인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고 내부가 건축 박물관으로 개조된 채 관광 명소로만 활용되고 있는데, 지난 문화대혁명 시기에 건물 일부가 훼손되었다가 근래 들어 복구되었습니다.
중국의 여느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이 건물의 안팎을 거닐면서 한 때 이곳 할빈이 러시아 밖의 도시 가운데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음을 되짚어볼 따름입니다.
▲ 짜오린공원 안에 남겨진 안중근의 자취.이토히로부미 사살 후 뤼순 감옥에 수감 중일 당시 남긴 글을 집자해서 새겨놓은 비석이다. ⓒ 서부원
할빈 역에서 찾은 안중근의 '흔적'... 아, 아쉽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 몇몇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할빈 최대의 겨울 축제인 빙등제가 열리는 짜오린공원 안에 안중근이 죽음을 앞두고 뤼순 감옥에서 남긴 글을 집자해 새겨놓은 비석이 서 있습니다. 단정하게 새겨진 굵고 흐트러짐없는 획을 통해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지사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할빈시 조선민족예술관에도 그의 자취는 또렷이 남아 흔히 '안중근 기념관'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안중근의 생애와 업적 등이 사진 등 각종 사료들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는데, 다만 용어와 서술 방법, 역사적 관점 등이 북한의 시각에 가까워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좋게 보면 안중근이 역사적으로 남과 북을 연결해주는 매개 고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전시실 맨 끝에 그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로 언급한 15가지의 죄목을 게시하고 있는데, 피끓는 '대한국인'으로서 강인한 의지와 투철한 민족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다만 죄목 맨 마지막에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를 강조한 것은 언뜻 생뚱맞아 보이지만, 그가 그토록 갈구했던 동양 평화를 위해 일본을 동반자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할빈 조선민족예술관 전경.1안중근 관련 유물이 상설 전시되고 있어, 안중근 기념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층 한쪽에는 조선족들을 위한 소강당과 문화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 서부원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도시와 안중근의 '만남'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현장, 할빈역에서 시작됩니다.
이 도시가 우리에게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며, 말하자면 할빈의 '한국식' 랜드마크입니다. 오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번잡한 역사(驛舍)를 통과해 플랫폼으로 들어가면 1909년 10월 26일, '그날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는 않지만, 안중근과 이토히로부미가 섰던 자리와 총을 겨눈 방향을 보여주는 보도블록이 새뜻하게 깔려 있습니다. 안중근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는 주변과 다른 모양의 이 보도블록이 그저 보수한 흔적쯤으로 여길 뿐입니다.
'만약 그가 중국인이었어도 역사적 현장을 이렇게 방치해 놓았을까?'
물론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후대 사람들이 '필요한 역사'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자국의 '입맛'에만 맞추다 보니, 정작 공유할 수 있는 역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안중근의 거사가 당사국인 우리나라와 일본은 물론, 중국·러시아 등과 밀접하게 관련된 역사의 '접점'임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 안중근의 이토히로부미 저격 현장.할빈역 내에 '그때의 현장'이 암호처럼 남아있다. 사진 앞쪽의 삼각형이 안중근이 섰던 자리이고, 총구방향으로 꼭짓점이 나 있다. 저 뒤 기둥 옆에 사각형 보도블록이 보이는데, 그곳이 이토히로부미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던 곳이다. ⓒ 서부원
마루타의 기억... 증오심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가해자든, 피해자든 역사가 남긴 자취를 찾아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그릇된 과거를 성찰하고 올바른 미래를 설계하는 노력이어야 함에도, 외려 의도와는 달리 끊임없는 불신과 증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유적도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세균전 부대로 더 잘 알려진 731부대가 그것입니다.
할빈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남짓 거리의 남쪽 외곽 넓은 부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당시의 건물 대부분은 헐린 채 본부와 부속 건물 두어 채가 이어진 채 힘겹게 버티고 서 있습니다. 현재 당시 일본군의 반인도적 만행을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2층에서 시작해 1층으로 내려오는 동선으로 짜임새 있게 꾸며져 있습니다.
2층에는 세균 배양과 실내외에서 행해진 생체실험 과정이 적나라하게 재연되어 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이 천인공노할 만행이 있었음을 최초로 밝혀준 네 사람의 기록과 사진, 그리고 추후 공개된 수많은 '마루타'들의 면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 할빈 731부대 본관 건물의 모습.넓은 부지에 옛 부대의 본관 건물과 부속 건물 몇 동이 폐허가 된 채 남았는데, 현재 1, 2층 일부가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서부원
과거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인지 괴발개발 '반전평화(反戰平和)'라고 적은 어린 아이의 메모가 살벌한 전시관 분위기와 대조되어 도드라져 보입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 곳을 둘러본 중국인과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특히 어린이라면? 편견이 전혀 없을 순 없겠지만, 아마도 일본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먼저 일어났을 것 같습니다.
20세기 초 대결과 전쟁의 참혹하고 삭막했던 시대를 넘어 '상생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요즘이지만, '리얼'한 전시물들은 외려 극단의 메시지만 차갑게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731부대를 이끌었던 의사 출신 군인, 이시이 시로는 일본 패전 후 모든 생체실험의 연구 성과를 승전국인 미국에 인도해주는 대가로 씻을 수 없는 반인도적 죄과를 용서받게 됩니다. 학살자에 대한 치떨리는 증오감이야 당연하다 하겠지만, 그것이 안내판에 적힌 낙서마냥 '쪽바리 처단'이라는 집단적 적개심으로 드러나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폐허로 남은 생체실험의 현장을 아파트가 감싸안고 있다.참혹했던 생체실험의 현장은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만 남긴 채 폐허로 변했지만, 그 주변이 아파트로 둘러쳐져 있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 서부원
일본보다 전쟁을 미워하라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적 과오를 '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참혹한 현장을 통해 지난 역사를 성찰하고 미래의 가치를 공유해야 합니다. '일본'의 이름을 기억하기 전에 '제국주의'와 '전쟁'을 먼저 미워해야 하고, 두루뭉수리 '평화'와 '번영'을 얘기하기 전에 '인간의 존엄'을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731부대 유적을 나와 할빈을 벗어나면서 다시금 (역사가 아닌) '국사'가 지닐 수밖에 없는 자국 중심적 사관과 서술적 한계를 떠올려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중국에서는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 안중근을 우리나라에서는 '영웅'이자 '의사'로,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그렇게 배운 그들이 나중에 만나 안중근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어떤 얘기가 오가게 될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역사'가 던져 준 중압감 탓인지 버스에 오르자마자 몸과 마음이 축 늘어졌습니다. 오늘 밤 늦게 조선족 학교와 김좌진의 자취가 남아 있는 하이린에 닿고서야 깰 것 같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지난 7월 22일부터 8월 5일까지 (사)동북아평화연대가 주관하는 연해주-동북3성 답사에 참가한 후 정리한 기록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