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추리무협소설 <천지> 266회

등록|2007.09.05 08:16 수정|2007.09.05 08:24
"그러고는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신념을 허물고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이지. 결론은 회의 붕괴였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평생을 바쳐 한쪽 다리가 되어왔던 회를 없애버리기로 작정한 것이지."

"그는 많이 괴로웠겠군."

중의가 허탈하게 말을 뱉었다. 이제는 자신도 감출 것이 없었다. 혈서의 장인(掌印) 중 이름이 없는 것의 주인이 철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온갖 생각이 그의 뇌리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지금 성곤이 말한 대로의 결론을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랬겠지.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일을 결정하자 오히려 편안해 했다네. 자신의 죄악이나 감추고 싶은 많은 것들에 대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했던 죄책감을 털어버리게 된 것이지. 아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네."

"…"

"그리고 그는 거대한 회를 어떻게 완벽하게 붕괴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모사(謀士)가 필요했지."

"함곡이라는 결론을 내렸겠군."

"상만천에게 있는 용추를 능가할 인물은 함곡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네. 함곡은 쉽사리 철담의 제의에 응하지 않았어. 철담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

오히려 함곡 자신을 이용해 회를 장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더 컸다. 그 동안의 철담은 분명 그랬고, 함곡 같이 신중한 사람이 그를 선뜻 믿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이 일이 시작된다는 마지막 제의까지 한 것이라네. 자신의 죽음이 확인되는 때에 이 거사를 실행할 것을 제의했던 것이지."

"그렇다면 철담은 함곡을 얻기 위해 죽었단 말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네. 다른 이유가 오히려 더 많았지. 그는 어차피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이었네. 자신의 죄악을 죽음으로써 씻고자 이미 결심하고 있었지. 더구나 그의 죽음은 이 거사의 빠지면 안 될 중요한 계획의 일환이었네."

"?"

"상만천과 추태감을 직접 움직여 운중보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으로는 그의 죽음밖에 없었다네."

중의는 둔기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불안한 그림자의 실체가 이제 거의 다 벗겨졌다. 결국 모두 죽이기 위한 것이다. 모두 운중보로 불러들여 죽이고자 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수뇌부부터 잘라내기로 한 것이고 그것이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회를 붕괴시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리고 그는 운중의 손에 죽기를 원했지. 철담은 언제나 운중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 더군다나… 아니… 하여간 그 누구보다 먼저 운중에게 용서받고 싶어 했다네."

"나는 수차례에 걸쳐 그를 진심으로 용서했다고 말했다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네."

보주가 오랜만에 술을 들이키더니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성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의 기준이 다르다네. 자네가 아무리 용서해도 그는 그 용서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 그것이 자네에게 죽여 달라고 사정했던 이유라네. 자네 손에 죽어야만 자신이 용서받는다고 생각한 것이지."

운중이 다시 잔을 채우고는 술을 들이켰다.

'자네가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잠시 후 제자에게 살해되는 사부가 될 것이네. 나는 어차피 죽을 것이네. 자네는 어찌 그리 야박한가? 그래도 정을 주었던 제자가 패륜아가 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한단 말인가?'

'나를 좀 도와주게…평생 자네에게 빚을 지고 살고 있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빚을 더 안고 가겠지만 제발 부탁을 들어주게. 자네 손에 죽어야…그리고 반드시 자네의 심인검에 죽어야 나는 내가 죽고 난 뒤에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네.'

'또 한 가지 부탁하네만…자네는 자네의 회갑연 날 아침까지만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모른 척 해주게…나머지는 성곤에게 부탁해 놓았네.'

몹쓸 친구였다. 자신에게 더 큰 괴로움을 안겨줄 것을 뻔히 알면서 자신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부탁을 한 친구였다. 하지만 친구였고, 그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철담은 죽는 순간까지 연기를 하고 죽었다. 행복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끝까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죽었다.

'자네도 이번에 그 아이들을 불러들이려고 생각하고 있지? 하지만 나는 자네가 죽지 않았으면 하네…제발 죽지 말게…그리고 지금부터의 자네 삶은 자네 마음대로 보내게…자네를 위해 한적한 곳에 집을 마련해 두었다네.'

끝까지 철저하게 준비를 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그냥 자신의 시신은 들짐승의 먹이로 주라는 부탁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다. 운중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르면서 연거푸 두 잔의 술을 마셨다.

"철담은 자네에게도 한 가지 부탁을 했다네. 그리고 나에게도 아주 몹쓸 부탁을 했지."

성곤은 중의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성곤의 얼굴에 애매한 표정이 떠올라 있어 그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철담이 나에게 한 부탁이란 것이 무엇인가?"

중의가 묻자 성곤이 중의의 시선을 피했다. 말하기 곤란한 듯 술잔의 반쯤 마시더니 내려놓았다.

"철담은 자네에게…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했네. 이 친구 회갑연 해가 뜨기 전까지."

그 말을 던지고 성곤은 다시 남은 술잔을 훌쩍 비었다. 중의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중의도 이때만큼은 참기 힘들었는지 술을 단숨에 비어버렸다.

"포기하지…않는다면…나까지 죽이라 했겠군."

성곤이 괴로운 시선으로 중의를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것이 철담이 나에게 한 부탁이라네."

말을 듣고 있던 제자들의 얼굴색이 또 다시 변했다. 철담어른이 모든 것을 주도했다. 그리고 거사를 시작하기 전 그는 스스로 죽었다.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자네는 나를 죽이겠군."

"나는 그 부탁을 거절했지만 그가 죽은 직후 그의 시신 앞에서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승낙했네."

운중이 그를 죽이고, 이 말에는 어폐가 있지만 하여간 철담이 죽은 직후에 성곤이 매송헌에 간 것은 사실이었다. 친구의 또 다른 부탁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바로 혈서와 회의 신물인 목단화 세 송이가 담긴 목갑을 함곡에게 전해주라는 철담의 부탁.

"자네는 내일 아침 태양이 뜰 때까지 이곳을 나설 수 없네. 그리고 자네가 그 때까지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자네는 내일 아침 해를 볼 수 없을 것이네."

성곤은 중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