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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 종택에서 김종직을 생각한다

[도 경계를 넘나든 이틀간의 답사여행③ ] 경북 고령 3

등록|2007.09.05 11:04 수정|2007.09.05 12:06

▲ 점필재 종택 전경 ⓒ 이상기


고령읍에는 두 개의 국도가 지난다. 33번 국도가 남쪽 합천에서 북쪽 성주로 이어진다. 그리고 26번 국도가 서쪽 거창에서 동쪽 대구로 이어진다. 점필재 종택은 고령읍에서 33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가다 보면 쌍림면 합가리 개실 마을에서 만날 수 있다.

개실이라고 하면 물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인데, 하천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곳 사람들에 의하면 '아름다운 마을'이라 해서 가곡 또는 가실이라 부르다 개실로 변했다는 것이다. 무오사화(1498)때 부관참시를 당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5대손이 1650년경 이 마을로 피해 살 때, 꽃이 아름답게 피어 개화실(開花室)이라 이름 지었다는 설도 있다.

개화실이 개애실이 되고 개애실이 다시 개실로 변했다는 것이다. 개실은 현재 합가리의 중심 마을이며 일선 김씨의 집성촌이다. 일선 김씨는 우리에게 선산 김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金叔滋: 1389~1456)를 통해 고려 말에 시작된 정통 주자학맥과 연결된다. 김숙자는 스승인 길재로부터 주자학을 배웠기 때문에 그의 학맥은 정몽주에게로 이어진다.

▲ 1709년 영의정에 증직된 교지: 후손인 김병식씨 소유 ⓒ 이상기


김숙자는 1419년(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령현감 등을 지냈다. 1456년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인 밀양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런 연유로 김종직은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1446년(세종 28년) 소과에 응시했다 낙방한다. 이때 김종직은 시험관이 자신의 문재를 알아보지 못함을 한탄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리고 13년 후인 1459년(세조 4년)에야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김종직은 과거를 보러 밀양에서 한양으로 가면서 이곳 고령 고을을 거쳐 성주로 이어지는 현재 33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고령 현감을 지내 한때 고령에서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점필재의 후손들은 무오사화로 멸문지화를 당한 후 이곳 고령 땅으로 숨어들어 살게 되었던 것이다. 점필재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등 예의와 문장을 다루는 부서의 책임자를 거쳐 1489년 형조판서와 지중추부사를 끝으로 벼슬을 마감한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 온 김종직은 1492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6년 후인 1498년(戊午) 김종직의 제자들이 중심을 이룬 사림파는 유자광 등 훈구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 가게 된다. 이때 김종직의 시신도 무덤에서 꺼내져 목이 잘리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 인해 김종직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5대손이 이곳 개실 마을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 종택의 사랑채에 '문충세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이상기


점필재 종택은 33번 국도에서 북쪽으로 약 100m쯤 들어가면 마을 뒷산을 배경으로 남향에 자리하고 있다. '점필재 종택'이라는 표지판과 표지석이 길 좌우로 있고 그 앞으로 대문이 있는 문간채가 집의 안과 밖을 구별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문충세가(文忠世家)라는 편액이 걸린 사랑채가 나타난다. 문충은 점필재의 시호로 1493년 성종에 의해 내려졌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성을 극진히 하였고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으며, 남의 착한 일을 숨기지 않았고 남의 악한 일을 들추어내지 않았으며, 청결하면서도 편협하지 않았고 유화하면서 세속에 뇌동하지 않았다. 문장과 도덕이 세상에 우뚝 뛰어나 참으로 삼대(三代)의 남긴 인재로서 그 사문에 공(功)을 끼친 것이 중대하다. 시법(諡法)에 도덕박문(道德博文)을 문(文)이라 하고, 염방공정(廉方公正)을 충(忠)이라 한다."(점필재 선생 연보: 佔畢齋先生年譜)

▲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바라 본 동쪽 풍경 ⓒ 이상기


사랑채는 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져 접대와 숙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마당이 있어 집안의 중심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외부 사람이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를 오른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곳 사랑채와 중사랑채 사이 오른쪽으로 중문이 있어 이곳을 나가면 사당과 연결된다.

전체적으로 튼 ㅁ자 구조의 집으로 창고가 안채 옆에 붙어 있다. 집안에는 점필재 종가에 전해오는 서책과 문집, 유품과 문서가 있다고 하나 볼 수는 없다. 또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내부 공간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다만 사랑채의 대청마루는 개방되어 있어 옛날 선비들의 풍류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 사랑채에서 바라 본 안채의 모습 ⓒ 이상기


대청은 앞이 틔어 있고, 뒤는 문을 통해 안마당과 연결된다. 양쪽의 벽 중 서쪽 벽은 나무 기둥과 흙벽으로 대청과 방을 나누고 있다. 동쪽 벽은 나무판으로 만들어 더운 여름에는 열고 추운 겨울에는 닫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남쪽은 대문채로 약간 가려져 있기는 하나 앞의 들판이 잘 보이고, 동쪽으로는 개실마을의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집 뒤 언덕에는 대나무들이 푸르고 똑바로 자라 선비의 지조를 보여주는 듯하다.

점필재 김종직은 이곳 종택에서 산 적이 없다.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을 뿐이다. 밀양에 낙향 후 점필재는 그곳에서 초가집 하나 새로 짓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다고 한다. 더욱이 아들들이 일찍 죽고 늦게 얻은 막내 김호년(金蒿年)을 통해 가계를 이을 수 있었다. 더욱이 사화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 났으며, 그의 5대 자손이 이곳 개실마을로 들어오면서 선산 김씨 문충공파 집성촌을 이룰 수 있었다.

▲ 담밖 동쪽에 있는 사당의 모습 ⓒ 이상기


덧붙이는 글 "도 경계를 넘나든 이틀간의 답사여행" 세번째 이야기, '점필재 종택' 편이다. 점필재 후손들이 살면서 지은 집으로 전통적인 양반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조선 성리학의 대부 김종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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