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회식이 있어 좀 늦을 것 같아.”
“예? 오늘이 어머님 제삿날인데--.”
“뭐라고?”
“세상에, 어머님 제삿날도 잊었어요?”
통화를 마치고 확인을 해보니, 틀림없었다. 양력이라면 잊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으로 핑계를 대본다. 그러나 그것이 용납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 저런 생각으로 합리화를 시켜보려고 하지만, 모두가 변명일 뿐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놓아버리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였다. 자식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도 많고 고마운 사람도 아주 많다. 그들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만큼은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99%가 어머니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1%도 어머니의 영향권 안에 있다. 그러니 100%가 어머니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 기일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세상에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은 염치가 없는 사람이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일컬어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가 없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생각하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설 뿐이다.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어머니의 전부는 자식들이었다.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셨다. 당신의 안일이나 욕심을 채우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셨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당당하게 맞섰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오늘의 나가 존재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삶은 질곡의 연속이었다. 역사의 격동기를 사시다 가셨으니,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은 정말 컸다. 일제의 침탈 지배를 거쳐 전쟁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겪어야 하였다. 그 후유증으로 나타난 가난이란 넘기 어려운 고개였다. 당신은 굶으면서도 자식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시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첫 월급을 받아 어머니께 드렸을 때 하시던 말씀이었다. 굽은 허리를 어렵게 펴시면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생하다. 회갑 상을 차려 드렸을 때 절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던 모습도 역력하다. 장가들지 못한 아들이 차려준 상은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셨다.
삶의 구석구석에 어머니의 사랑이 배어 있었다. 생활 자체에 스며들어 있어 잘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에는 더더욱 그랬었다.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고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돌아가시고 난 뒤의 허망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에게 효도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참을 수가 없었다.
절박하던 마음은 세월 따라 희미해졌다. 10 년이 넘어가고 20 년이 되어가니 시나브로 잊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 기억하지 못하였다니, 용서할 수가 없다. 자책감이 커진다. 양해를 구하고 회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일찍 귀가하였다. 벌써 동생이 와서 집사람과 함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 곳에 살고 있는 동생이 제일 먼저 왔다. 조금 늦게 누님도 오셨다. 오랜만에 동생과 누님의 얼굴을 보게 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형제들의 마음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다. 장자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이슬을 머금은 풀잎을 보면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여린 풀잎에 맺혀 있는 물방울들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어서 눈이 부시다. 바라보는 마음까지 보석이 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답다. 동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런 마음을 닮아 있었다. 동생에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제사를 모셨다. 지난 1 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물론 기일을 기억하지 못한 죄송함도 말씀드렸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더욱 돈독하게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어머니가 기뻐하실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른거리는 모습을 잡으려고 애를 써보았다. 제사를 무사히 마쳤다.<春城>
“예? 오늘이 어머님 제삿날인데--.”
“뭐라고?”
“세상에, 어머님 제삿날도 잊었어요?”
통화를 마치고 확인을 해보니, 틀림없었다. 양력이라면 잊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으로 핑계를 대본다. 그러나 그것이 용납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 저런 생각으로 합리화를 시켜보려고 하지만, 모두가 변명일 뿐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놓아버리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였다. 자식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리운 어머니자식만을 위하여 살다 가신 어머니 ⓒ 정기상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도 많고 고마운 사람도 아주 많다. 그들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만큼은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99%가 어머니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1%도 어머니의 영향권 안에 있다. 그러니 100%가 어머니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 기일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세상에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은 염치가 없는 사람이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일컬어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가 없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생각하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설 뿐이다.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어머니의 전부는 자식들이었다.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셨다. 당신의 안일이나 욕심을 채우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셨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당당하게 맞섰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오늘의 나가 존재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삶은 질곡의 연속이었다. 역사의 격동기를 사시다 가셨으니,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은 정말 컸다. 일제의 침탈 지배를 거쳐 전쟁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겪어야 하였다. 그 후유증으로 나타난 가난이란 넘기 어려운 고개였다. 당신은 굶으면서도 자식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시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첫 월급을 받아 어머니께 드렸을 때 하시던 말씀이었다. 굽은 허리를 어렵게 펴시면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생하다. 회갑 상을 차려 드렸을 때 절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던 모습도 역력하다. 장가들지 못한 아들이 차려준 상은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셨다.
▲ 이슬아름다운 세상 ⓒ 정기상
절박하던 마음은 세월 따라 희미해졌다. 10 년이 넘어가고 20 년이 되어가니 시나브로 잊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 기억하지 못하였다니, 용서할 수가 없다. 자책감이 커진다. 양해를 구하고 회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일찍 귀가하였다. 벌써 동생이 와서 집사람과 함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 곳에 살고 있는 동생이 제일 먼저 왔다. 조금 늦게 누님도 오셨다. 오랜만에 동생과 누님의 얼굴을 보게 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형제들의 마음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다. 장자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이슬을 머금은 풀잎을 보면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여린 풀잎에 맺혀 있는 물방울들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어서 눈이 부시다. 바라보는 마음까지 보석이 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답다. 동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런 마음을 닮아 있었다. 동생에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 생생한 추억새월 속에서도 살아 있고 ⓒ 정기상
제사를 모셨다. 지난 1 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물론 기일을 기억하지 못한 죄송함도 말씀드렸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더욱 돈독하게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어머니가 기뻐하실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른거리는 모습을 잡으려고 애를 써보았다. 제사를 무사히 마쳤다.<春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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