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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늑시>의 이수현은 도덕적 딜레마가 약했다

기억도 없는 아버지에 대한 집착과 복수 개연성 약해

등록|2007.09.07 16:58 수정|2007.09.11 09:41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에는 ‘완전한 은둔자’라는 단편이 있다. 이 작품에서 귀스타브는 육체는 거추장스럽다며 정신의 자유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육체에서 자신의 뇌를 분리하는 실험을 한다. 의사들을 시켜 뇌를 따로 떼어 영양액 속에 넣어놓게 한다. 완전한 은둔자가 되려는 것이었다. 의사들은 뇌의 경동맥 끝을 통해 산소와 영양소를 얻도록 했다. 귀스타브의 아내 발레리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아빠는 죽은 게 아니야 약간 모습이 달라진 거야" 그러나 아내 막내딸이 그 영양액 속의 뇌를 보고 구토하며 말한다. "저게 아빠란 말이야?"

존재를 의식하려면 소통과 접촉이 있어야 하며 그것에 따른 기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귀스타브의 뇌는 비록 혼자 살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아빠라고 기억될 요소가 없다. 아빠라는 존재는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접촉의 산물이다.

▲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 ⓒ MBC


종영된 MBC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이수현(이준기)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국가정보기관의 비밀도 빼내어 사적인 복수에 이용한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는 소재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에는 이러한 설정이 그렇게 빈번하지는 않다. 서양인들에게 개인의 사적인 복수를 위해 국가정보를 빼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이색적인 설정으로 사용될 수는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효도를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받아들여지고 한다.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명분일 때 불법 행동도 용인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어찌되었든 사적인 원한을 위해 공공의 원칙을 망각하는 것은 한국대중문화의 단골소재다. 그런데 이러한 사적인 복수의 문제는 곤란한 상황을 낳을 수도 있다.

예컨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라 여겼던 사람이 진범이 아닐 경우이다. 이럴 경우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일련의 위법은 의미가 더욱 없어지게 된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사실은 아버지와 친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수현은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절친한 친구를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친구를 죽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그 사실에 이수현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미 아버지의 친구는 자신의 총에 죽어가고 있었다.

윤리적으로 친구의 아버지를 죽일 수 있을까? 아무리 범죄자라고 해도 말이다. 무엇보다 허무한 결과였다. 물론 드라마는 처음부터 선악의 경계는 불분명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럼에 따라 마지막으로 이수현은 자신을 스스로 해칠 수도 있지 않나 싶었다.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가는 듯이 보였다.

<여씨춘추>에서 석저는 매사에 공정한 사람으로 왕의 치안관을 맡고 있었다. 살인범의 뒤를 쫓게 되었는데, 그 범인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석저는 아버지를 체포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에 어긋나고, 체포하지 않으면 국법을 어기는 것이니 고민에 고민을 하게 된다. 그는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스스로 형틀에서 목숨을 끊었다. 이 정도의 도덕적 딜레마 상황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이수현은 죽지 않는다. 친구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은 주인공 이수현의 죽음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도덕적 딜레마가 약한 셈이다. 더구나 어머니도 죽인 범인이 아니던가. 그러니 마지막 장면에서 읊조리는 이수현의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말은 멋지게 보이려는 수사로 보인다.

이 드라마에서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적 딜레마가 아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하루 중에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부르는 시간이 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땅거미가 내리면서 저만큼 다가오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시간이다.

이수현은 마지막에서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복수 대상이 절대 악인이 아니고 선을 지킨다는 정보국의 수장이 악인으로, 상대적 선악의 구도를 표현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원래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개는 자신을 지켜주는 충실한 수호자 충복을 가리킨다면 늑대는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을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선악의 불명확성으로 수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선과 악이 나의 이로움과 해로움, 나아가 복종과 저항의 관점으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살 때 죽은 아버지에 대한 집착과 개연성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형상화한 드라마는 있었다. MBC 드라마 <불새>에서 지은(이은주)의 아버지 상범은 한강 둔치에서 자신의 딸과 결혼한 세훈(이서진)을 두고 모멸감을 주면서 '개와 늑대의 시간'을 말한다.

"프랑스에선 이렇게 해가 질 무렵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하지...이때 개와 늑대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아...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은 개와 늑대를 구분할 수 있지. 자신에게 충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어쩌면 선택을 하는 건 개와 늑대인지 모르지. 야성을 버리고 복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이 안가는 상황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범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세훈에게 비수를 날린다.

"난 너 같은 부류를 잘 알아. 넌 결코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 못하지. 그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진 못할 테니까... 넌 그 누구에게도 꼬리치며 밥을 얻어먹을 개가 아니야. 그러니까 지은이를 놔 줘. 너랑 살면 지은이만 불행해져."

우리는 늑대인가, 개인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버전이라면 살아남기 위해 치욕을 감내하며 개가 되기도 하겠다. <불새>의 해석이 타당한지 아니면 '개와 늑대의 시간'의 형상화가 더 타당한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일 듯싶다. 해석은 다양할수록 좋을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더욱 당황스러운 점은 이수현의 아버지에 대한 집착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어머니에 대한 복수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더 타오른다. 마오를 죽이면서 이수현이 부르짖은 것은 아버지였다. 이수현의 아버지는 그가 한 살 때 죽었다. 이수현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접촉과 소통이 없어 기억이 없는 것이다. 기억이 없으니 추억이 없다. 오로지 사진과 유품인 시계뿐이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열정은 선험적일 뿐이다. 그 선험성에 따라 엄청난 원한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인물에게 처절하게 복수하려고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까지 말이다. 동양권에서는 문제될 일은 아니지만, 합리성을 강조하는 서양인들에게 개연성이 그렇게 충분하지는 않다. 하지만 베르베르의 '완전한 은둔자'에서 딸이 아버지의 뇌를 보면서 '저게 아빠야'라고 할 만큼 낯선 존재가 아닐까.

무엇보다 화려한 명분은 허구적인 경우가 많다. 사적 가치를 명문삼아 공적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기 가족을 위해서 살인과 폭력, 사기를 합리화하는 것이 동양사회의 부패를 키워온 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들이 결국 가까운 사람들과의 신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후쿠야마가 말하는 저신뢰 사회를 만들어온 동양사회의 특징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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