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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꿈나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

얼치기 농사꾼의 가을걷이

등록|2007.09.10 15:00 수정|2007.09.11 11:50

텃밭 고구마를 캐다


텃밭 고구마를 캐다텃밭 고구마를 캐다 ⓒ 박도

음력 팔월 초하룻날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다. 그 전날인 오늘은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아내에게 뭘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텃밭의 고구마를 캐 달라고 했다. 귀신도 장에서 사다가 차린 제수보다 손자가 직접 농사지은 걸로 올린 제수를 음복하시면 기분이 더 좋을 것이다.

바구니와 낫과 괭이, 호미를 들고 텃밭에 갔다. 올해는 고구마 줄기와 잎이 유난히 무성했다. 올봄에 옆집 노씨네 외양간 쇠똥을 경운기 한 대에 싣고 와 밑거름으로 넣었기 때문이다. 큰 기대를 하고서 고구마 줄기와 잎을 낫으로 걷고는 호미로 두둑을 팠다. 그런데 고구마 씨알 크기는 예년의 반도 안 되었다. 해마다 발전해야 할 농사솜씨가 오히려 거꾸로 퇴보한 셈이다.

곰곰이 되짚어보니 크게 두 가지를 잘못한 것 같다. 그 첫째는 고구마는 밑거름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말을 거슬렸다. 고구마 농사를 여러 해 지어보지 않은 탓이다. 그 두 번째는 고구마 줄기가 한창 뻗을 때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자주 뒤집어줘야 한다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여름 내내 장마로 내버려둔 탓이다. 그러자 고구마 줄기가 제 맘대로 땅에 뿌리를 내려 줄기와 잎이 엄청 기름지고 무성했다. 씨알에 가야 할 영양분이 죄다 줄기와 잎이 다 나눠 가진 모양이었다.

아내는 씨알이 가늘어 전도 붙일 수 없는 고구마를 보고는 텃밭에 고구마 다 캐도 모종값도 안 되겠다고 얼치기 농사꾼의 어설픈 농사솜씨를 나무랐다. 나는 그때마다 '사람이 어찌 모든 걸 잘할 수 있느냐'는 말로 입막음을 하고는 내년에는 올해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대로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작정을 하지만 과연 그럴지는 내년에 가 봐야 알겠다.

지난해 고구마지난해 고구마 ⓒ 박도

▲ 올해 고구마 ⓒ 박도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살아보니까 이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흔히들 농사를 땅 파먹고 산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농사일도 보통 힘든 게 아니다. 파종에서 수확까지 여간 손이 가지 않고 특히 농사는 하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비가 오지 않아도 탈이요, 많이 와도 탈이요, 날씨가 무더워도, 너무 선선해도 탈이다.

배추밭지난해 배추밭으로 배추값이 폭락하자 밭에서 썩고 있었다. ⓒ 박도

하늘이 도와 풍년이 돼도 농사꾼에게는 탈이다. 모든 곳의 농산물이 풍년이라 값이 폭락하여 중간도매상인들이 찻삯도 나오지 않는다고 밭의 작물을 뽑아가지도 않는다. 그러면 농사꾼들은 봄부터 여름 내내 밤잠 설치며 애써 가꾼 작물을 두 눈을 멀거니 뜬 채 밭에 썩히고 있었다. 그걸 보는 농사꾼의 타는 가슴을 도시민들이 어찌 헤아리겠는가.

우리 내외는 시골로 내려온 뒤로는 농산물을 사 먹을 때 절대 비싸다고 하지 않을 뿐더러 농사꾼이나 장사꾼에게 더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 유기농을 하는 농사꾼의 노고는 파는 값의 두세 배를 더 줘도 비싸지 않다.

"당신 같이 농사지으면 굶어죽겠소."
"원래 내가 농사꾼인가? 우리는 농사꾼들이 지은 농산물을 사 먹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오."


아내의 말에 대꾸하고는 사람은 제 적성에 충실한 게 시대감에 맞는 생활임을 절감했다. 마침 올 학기부터 이웃 횡성고등학교에서 논술지도를 부탁했다. 시골학생들에게 직접 돈을 받지 않기에 쾌히 응했다. 알차게 수업준비를 하여 농촌 꿈나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지금 내가 이 산골에 사는 가장 보람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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