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 타오르는 사랑은 어디에다 묻으라고
충남 공주 계룡산 신흥암과 상원암
▲ 산신각에서 내려다본 신흥암. ⓒ 안병기
절벽상의 폭포수는 콸콸, 수정렴드리운 듯, 이골 물이 주루루룩, 저골 물이 쏼쏼,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천방져 지방져 소쿠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같이 흩어지니, 소부 허유 문답하던 기산영수가 예 아니냐 - '유산가' 일부 누가 물을 일러 '다툼이 없다'라고 상찬했던가. 큰 폭포 소리가 끌고나가면 곧이어 더 큰 폭포 소리가 끼어들고 조금 빠른 물소리가 앞을 끌고 가면 느릿느릿한 소리가 섞어진다. 골짜기들은 제 자존심이라도 되는 듯이 자신이 가진 소리 공력을 있는 대로 쏟아 붓는다. 물소리는 다툼 속에도 화합을 보여주고 화합 속에서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을 보여준다. 오늘 계룡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국악관현악단 같다. 그리고 난 폭포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음악 중 가장 뛰어난 화음을 자랑하는 '시나위'를 감상하고 있는 셈이다.
▲ 산신각. ⓒ 안병기
▲ 충남 문화재자료 제68호 천진보탑. ⓒ 안병기
▲ 금잔디 고개 근처. ⓒ 안병기
▲ 길에서 마주친 보살. ⓒ 안병기
▲ 청량사지를 지키는 칠층석탑(보물 제1285호)과 오층석탑(봄물 제1284호). ⓒ 안병기
▲ 등산객들이 쌓아놓은 돌탑들. ⓒ 안병기
이 남매탑에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신라 때 이곳에서 상원이라는 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었다 한다. 어느 날 스님은 커다란 뼈가 목에 걸려 고생하는 호랑이를 구해준다. 얼마 후 호랑이는 아리따운 처녀를 업어다 놓고 갔다. 미물이지만 결초보은이라는 게 뭔지를 아는 녀석이다.
혼절했다 깨어난 처녀는 스님의 아내가 될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처녀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스님은 처녀에게 그러지 말고 남매가 되자고 제의한다. 스님, 이내 가슴속 타오르는 사랑은 어디다 묻으라고 저더러 중이 되라 하십니까. 몇 번 앙탈을 부려 보지만 처녀는 스님의 제의를 끝끝내 거부하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의남매로라도 곁에 존재하면서 스님을 바라보고 싶다는 손익 계산이 처녀를 그렇게 시켰으리라.
그렇게 해서 타오르던 처녀의 에로스는 잔잔한 아가페로 승화되고 만다. 전설은 스님과 처녀가 비구와 비구니로 지내며 수행에 정진하다가 한날한시에 입적했다고 전한다. 에로스에서 아가페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다. 사랑에서 소유욕만 제거하면 되니 말이다. 이 설화는 일종의 경전이다. 남녀 간의 에로스를 승화시켜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바꾼다면 부처되기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설하려는 것은 아닌지.
간절함이 없는 삶은 얼마나 삭막한가
▲ 구름에 쌓인 상원암 풍경. ⓒ 안병기
▲ 한 처사가 상원암 경내를 돌고 있다. ⓒ 안병기
상원암 경내는 조용하다. 이따금 울리는 풍경 소리가 암자의 존재를 상기시킬 뿐이다. 눈이 차츰 짙은 구름에 익어가자 암자 경내를 도는 할아버지 한 분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아래 해우소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법당 주위를 돌고 또 돈다.
할아버지는 이 빗속에서 무엇을 빌고 계신 걸까. 자손에 대한 발복일까 아니면 극락왕생을 비는 것일까.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할아버지는 내게 부러운 사람이다. 간절하게 소원할 것이 한 가지라도 남아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가. 간절한 것이 없다는 건 마음이 얼마나 삭막하다는 뜻인지!
남매탑을 뒤로 하고 내려간다. 비는 꾸준히 내리고 있다. 며칠 계속해서 내리더니 제풀에 지쳐서 격정을 잃어버렸나 보다. 저만치 아래에서 젊은이 네댓이 올라오고 있다. 길 찾는 눈과 격정만 있다면 비가 온다고 주저하겠는가, 눈이 온다고 서둘러 포기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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