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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손을 잡고 다닌 아이

추리무협소설 <천지> 270회

등록|2007.09.11 08:12 수정|2007.09.11 08:20
“쇄금도는 불확실한 변수였네. 분명 그는 상만천의 지시를 받고 사부를 시해하려고 운중보로 들어왔지. 가려란 계집과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한 상태로 말이야….”

“철담어른은 보주가 죽였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나?”

“자네 환시는 틀리지 않았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철담어른이 죽은 것을 처음 본 목격자가 윤석진이 되었단 말이네. 물론 그 이전에 회운사태와 성곤어른도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

“그는 자신이 처음 발견한 상태에서 상만천에게 이미 다른 사람이 사부를 죽였다고 보고하지 않았지. 자신의 공으로 돌리려고 말이야. 그러면서 그는 여전히 누가 사부를 죽였는지 조사하고 있었단 말이네. 만약 그가 상만천에게 자신이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죽였다고 했다면 상만천은 이상한 기미를 채고 곧바로 운중보를 나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거든.”

그랬을 것이다. 윤석진으로서는 굳이 굴러들어온 호박을 내차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누가 죽였든 간에 일단은 상만천의 지시는 이행했고, 그것을 남의 공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또한 상만천은 의심이 많은 자였을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의 계획이 아닌 다른 일이 발생했다면 그는 더욱 신중해졌을 것이고, 함곡이 거사를 시행하는데 거추장스런 변수가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다.

“진운청인가?”

풍철한이 불쑥 묻는 말에 함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풍철한이다.

“그렇다네. 자네도 짐작은 하고 있었군.”

“당연하지 않은가? 사건현장에 나타난 인물이 언제나 범인일 가능성이 높지. 추교학을 끌어들였고, 추교학이 말하는 것을 보니 당연히 진운청이라는 생각을 했다네.”

함곡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풍철한은 역시 자신도 알지 못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추교학을 끌어들임으로써 상만천이나 추태감이 그 사건에 대해 성급히 조사에 나서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추교학을 목격했던 진운청이 전혀 의심받지 않도록 만든 것은 확실히 자네다운 솜씨라고 생각했네.”

“지금 나를 비웃는 것 같군. 허허.”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네.”

아마 친구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자기와 단 둘이라면 몰라도 지금 여기에는 자신의 형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자리다. 함곡이 내심을 들킨 듯 머쓱해 하자 화제를 돌리고자 풍철한이 재빨리 물었다.

“뭔가?”

“팔숙이 누군가? 여러 가지 정황을 생각해 보면 이곳에 처음 들어온 능효봉마저도 팔숙 중의 한 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네.”

풍철한의 질문에 함곡은 애매한 표정을 띠었다.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사실…그것은 나도 모르네. 아니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본래부터 팔숙의 존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니? 무슨 대답이 그리 애매한가?”

“실상이 그러니 어찌하겠나? 팔숙이란 말도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보주가 말한 믿을만한 여덟 사람이라는 한 마디로 정해진 사람들인데 그들이 누군지 정확히 누가 알겠나? 대충 짐작은 할 수 있고 보주만이 정확히 알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그들 간에 어떤 유대관계가 있다든가, 서로 모종의 일을 공동으로 한다든가 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사실 팔숙의 존재 자체도 확실치 않은 것이네.”

정말 애매한 일이었다. 어떤 목적이 있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라 보주의 말 한마디에 주위사람들이 추측으로 생긴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허면 능효봉… 그 자식의 정체는 뭐야? 자네가 팔숙 중 하나냐고 물었을 때 그 자식의 표정을 보면 긍정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신을 가지고 물었던 것은 아니네. 그는 혈서에 인장을 찍은 인물은 아니지만 내가 철담어른의 부탁을 승낙하고자 마음을 굳히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 몇 번 익명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주었던 적이 있네.”

“뭐라고? 그럼 자네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능효봉, 그 자식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누군지 궁금했었네. 그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나에게 주었지. 정말 너무나 필요한 정보를 주었기 때문에 나 역시 운중보에 들어와 만나기까지 그 존재가 매우 궁금했다네.”

“도대체 그 자식이 누구야? 보주가 비밀리에 키운 제자인가?”

“아니네. 하지만 자네의 말도 모두 틀린 것은 아니네. 능대협은 과거 보주가 중원을 한바퀴 돌 당시 데리고 다녔던 어린애였으니까. 또 다른 제자일 수도 있네. 하지만 그의 내력은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하네. 아마 우슬소저나….”

함곡은 말을 하다말고 우슬과 귀산노인을 바라보았다. 우슬이나 귀산노인은 알고 있지 않겠느냐는 시선이었다. 솔직히 짐작은 하고 있지만 정확히 귀산노인의 입에서 듣고 싶기는 풍철한이나 다름없었다.

귀산노인이 함곡과 풍철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허나 정작 대답한 사람은 우슬이었다.

“그는 과거 구룡 중 대형이었던 천룡의 자제분이예요.”

쉽게 나온 대답치고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구룡의 후예, 그것도 구룡의 맏이인 천룡의 후예라니? 그런 자식을 보주가 왜 데리고 다녔던가?

천룡은 보주에게 패해 자결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어렸다고는 하나 능효봉은 부친의 원수의 손을 잡고 다닌 것이 된다.

“으음….”

풍철한이 신음과도 같은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까칠한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하더니 우슬을 보았다.

“그러면 설중행, 그 자식도 구룡의 후예요?”

우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역시 구룡 중 혈룡의 유복자(遺腹子)죠. 자신의 부친이 죽고 난 후 석 달 만에 태어난 사람이에요.”

“으음….”

정말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우연하게 눈에 띄어 데리고 들어온 자식이 혈룡의 자식이라니….

“그도 알고 있소?”

“아마 회운사태를 만났다면 지금쯤 알게 되었을 거예요.”

풍철한이 갑자기 시선을 함곡 쪽으로 홱 돌렸다.

“우연을 가장해 그 녀석을 내 눈에 띄게 하고 이곳에 데려오게끔 유도한 것이 자네야?”

그 말에 함곡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하지만 나는 그런 방법까지 생각하지 못했네. 그래서 나도 자네와 마찬가지로 이 모든 계획이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네. 설소협을 데려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말이지.”

함곡의 말에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이 이어졌고,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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