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Again 1998'에 부풀었으나...
[해외리포트] 럭비월드컵 개막전 패배 후 침울해진 프랑스
▲ 2007 럭비월드컵 홈페이지. ⓒ .
지난 주 금요일인 9월 7일, 럭비월드컵이 프랑스에서 막을 올렸다. 세계 구석구석에 골고루 전파되어 세계인을 열광케 하는 축구와 달리 럭비는 세계적 수준을 유지하는 일부 국가에서만 인기를 얻고 있다.
20개국이 참가한 이번 제6회 럭비월드컵에서 프랑스는 5~6개국 정도의 우승 후보에 포함됐다. 럭비올림픽 주최국민인 프랑스인들은 이 올림픽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많은 프랑스인들은 1998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 축구팀을 잊지 않고 있다.
당시 국민들은 열광적으로 응원했고, 프랑스 팀의 우승은 국민들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환희를 안겨줬다. 우승한 해에 프랑스 경제 실적은 향상되었고,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의 인기는 높아졌으며, 정치인들은 고조된 프랑스인의 사기를 팽배했던 사회적 상처를 어루만지고 점점 늘어나는 방리외(파리를 비롯한 대도시 외곽지역, 2005년 말 당시 내무장관이던 사르코지가 이곳 젊은이들을 "청소해야 할 오물"로 표현하면서 소요가 발생했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데 이용했다.
프랑스 축구팀은 대부분 이민세대와 바다 건너 프랑스 식민지 출신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의 성공이 프랑스에서는 일종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출신성분이 다르고 출신계층이 낮더라도 노력만 하면 한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보여준 셈이다.
1998년은 프랑스 팀의 우승과 함께 모든 것이 가능한 해였다. 이것이 당시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한 메시지였다. 스포츠가 다시 한 번 국가단결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스포츠가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모든 국가는 국민의 노력과 경쟁이 필요할 때마다 스포츠 정신을 강조하여 정치에 이용해온 게 사실이다.
럭비월드컵도 예외는 아니다. 럭비월드컵이 시작되기 몇 주일 전부터 대부분의 프랑스 언론에서는 럭비월드컵을 대규모로, 정기적으로 선전했다. 모든 사람들이 럭비를 보고 럭비를 생각하며 럭비를 마시고 럭비를 먹어야 했다. 누구도 럭비의 결과를 의심하면 안 되었다. 이런 지속적인 선전 탓에 프랑스 팀의 우승은 손만 벌리면 잡힐 곳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프랑스 럭비팀의 선수 선발 감독인 베르나르 라포르트는 이미 여러 선전에 참여해 대중에게 익숙한 인물인데 지난주에 이런 말을 하기까지 했다. "프랑스팀의 경기가 있는 금요일에 모든 사람이 푸른색 옷을 입고 출근하기를 원한다." 푸른색은 프랑스 팀의 유니폼 색이며, 이 말은 프랑스 팀을 응원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언론을 보면 모든 프랑스인이 럭비를 통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고 럭비가 모든 가치를 표현하는 스포츠가 되었는가 하면, 럭비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럭비가 발명되기 전에 인류사회가 어떻게 지탱되었는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아름답게 처리된 럭비 선수들의 경기 모습이나 거의 나체로 포즈를 취하는 럭비 선수들의 사진이 포스트모던 아이돌이 되었다. 이들은 뭐라고 규정하기 힘든 명분을 위해 싸우는 경기자가 되는데, 짐승에 가까운 모습으로 카메라에 포착되는 이들의 야성적인 모습은 오랜 연구 끝에 나온 것이다. 몇몇 유명 메이커들은 제품을 팔기 위한 목적으로 이들의 남성적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꿈에 부풀었기에 더욱 쓰라린 패배... 사르코지 계획에도 제동 걸려
그런데 결과는 가혹했다. 9월 7일 금요일 밤 10시 30분, 포스트모던의 영웅들은 프랑스 경기장에서 열린 럭비월드컵 개막 경기에서 아르헨티나에 의해 격파되는 쓰라린 경험을 해야 했다. 12:17라는 점수가 대단한 격차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으나, 주최국인 프랑스 팀 선수들이 느껴야 했던 수치심은 대단해 보였다.
그동안 시도 때도 없이 행한 선전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날 밤 파리 거리는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프랑스 국기를 꽂고 밤길을 달리는 자동차도 없었고 클랙슨을 울려대는 차는 더더구나 없었다. 밤 11시 30분경, 한 지하철 안에선 뺨에 프랑스 3색기를 그린 한 응원자가 처량한 모습으로 졸고 있었다.
프랑스 팀의 코치 베르나르 라포르트도 완전히 구겨진 상태다. 라포르트는 어쩔 수 없이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 팀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라포르트는 조만간 스포츠 장관으로 임명될 예정이다. 금요일 밤에 경기를 직접 지켜본 사르코지 대통령이(사르코지 외에도 14명의 장관이 이 경기를 지켜보았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라포르트에게 스포츠 장관자리를 내주기로 한 상태다. 공식적으로 라포르트는 10월 21일 로즐린 바슬료 현 스포츠 장관의 후임자가 될 예정이다.
프랑스 팀의 개막경기 패배는 사르코지 정책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프랑스 팀의 우승으로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고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던 사르코지의 계획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지난 4월 ESSEC(경제와 상업과학 상급학교)의 스포츠마케팅부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번 럭비월드컵으로 프랑스가 4년 간 얻게 될 경제 파급효과는 80억 유로며 이 중 50%인 40억 유로가 올해에 귀속된다고 주간지 <르 카나르 앙세네>는 9월 12일자에서 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 팀이 우승한다는 조건에서다. 럭비월드컵을 통한 경제성장 효과를 기대했던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제 다른 곳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언론들도 이번 럭비월드컵에 쏟는 관심이 지대했다. 특히 프랑스 민영 TV방송사인 TF1은 이번 럭비월드컵과 2011년에 뉴질랜드에서 개최될 차후 럭비올림픽 중계를 위해 8천만 유로를 지불했다. TF1이 프랑스 팀의 우승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프랑스 팀이 결승에 오르면 보통 8만3천 유로에 해당하는 30초당 광고단가가 그 두 배가 넘는 17만5천 유로로 오르기 때문이다.
출판사들도 럭비 붐에 가담했다. 지난 6월부터 9월말까지 프랑스에서 150여개에 달하는 럭비 관련 책이 이미 출판되었거나 출판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 중 <또 다른 리더십을 위한 럭비 정신>이란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선 미셀-알리오 마리 내무부 장관,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시장, 재계 거물인 끌로드 베베아르 등 유명 인사들이 럭비와 매니지먼트의 밀접한 관계를 7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번 일요일인 16일,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와 경기에서 대표팀이 선전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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