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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돌로 만든 이유

[중국기행 43] 이화원(이허위안·和園) 기행

등록|2007.09.14 09:31 수정|2007.09.14 09:51
버스는 북경의 잘 닦인 순환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최근에 지어진 수많은 빌딩들이 지나갔다. 거대한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북경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었다. 버스는 한참을 달리고서야 베이징 서북쪽 외곽에 자리한 이화원(이허위안, 頤和園)에 닿았다.

이화원이 북경 시내에서 15km 떨어져 있으니, 북경 여행을 오는 사람이라면 자금성과 함께 꼭 둘러보고 가는 곳이 이화원이다. 이화원은 중국 최대의 별궁이자 별장과 같은 곳인데, 청나라 말기를 풍미했던 서태후(西太后)가 여름을 보냈던 여름 별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 이화원은 1860년에 영불연합군에 의해 문화재 상당수가 파괴되었으나, 다시 중수되었다. 1998년에는 이화원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이화원의 동쪽 출입문인 동궁문(東宮門)을 통해 이화원 안으로 들어섰다. 이화원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인수전(仁壽殿)은 광서제(光緖帝)의 뒤에 앉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곳이다. 인수전은 북경 올림픽을 맞이하여 보수공사 중이다. 인수전이 그려진 장막 안에 들어선 진짜 인수전은 전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일행은 인수전을 통과해 잠시 전각 밖으로 나왔다. 이화원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는 인공호수인 곤명호(昆明湖)를 보기 위함이다. 인공호수라고 믿기에는 너무 기가 막히게 넓은 호수 위에 유람선들만이 점점이 떠 있다. 중국에서는 익히 봐 온 거대 호수이지만, 물 가득 찬 호수를 바라보면 항상 마음은 평온해진다.

곤명호드넓은 인공의 호수 위에 유람선이 점점이 떠 있다. ⓒ 노시경


이화원에는 온통 서태후의 폭정을 상징하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몇 개의 문을 통과하자 광서제가 유폐되어 있던 옥란당(玉瀾堂)이 나온다. 서태후는 아들이었던 동치제(同治帝)가 18세에 천연두로 일찍 죽자 친정 조카를 황제로 만들었다. 그 황제, 광서제는 자라서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과 같은 변법유신운동(變法維新運動)을 일으키고 황제의 권력을 되찾으려 하였다. 권력의 실세였던 서태후는 이 황제가 움직이지 못 하도록 가두었고, 그 건물이 바로 옥란당이다.

낙수당 낙수당 앞의 학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 노시경


옥란당 건물 안쪽을 보니 벽돌로 쌓은 벽이 보인다. 광서제가 외부와 소통을 하지 못하도록 서태후가 쌓은 벽이다. 광서제는 여기에서 한 많은 생을 살다가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에 서태후의 명으로 독살 당하여 죽는다.

여기에서 선예문(宜芸門)의 문턱을 넘었다. 이곳에는 광서제의 황후가 갇혀있던 선예관(宜芸館)이 나온다. 그녀는 바로 옆 건물에 위폐당한 남편을 두고도 만나지 못했던 비운의 황후였다.

또 몇 개의 문을 넘자 이화원 내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이 나온다. 서태후가 머무르던 공간인 낙수당(樂壽堂)이다. 원래 이곳은 건륭제가 어머니인 황태후를 모시고 이화원의 거대한 호수인 곤명호의 경치를 즐기던 곳이었으나, 서태후가 이곳을 자신이 잠을 자는 침궁으로 개조하였다.

이 낙수당 앞에는 학(鶴), 병(甁), 사슴(鹿)의 동상이 각각 한 쌍씩 좌우로 놓여 있다. 이 청동상의 발음을 중국 한자 발음으로 읽으면 순조로운 인생의 길을 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사실적으로 잘 만들어진 청동상이지만, 서태후가 이곳에서 순조롭게 오래 살수록 청나라의 국력은 쇠퇴해 가기만 했다.

낙수당을 나오자 길이 700m가 넘는 장랑(長廊)인 천간낭하(千間廊下)가 이어진다. 내 과거의 이화원 기억 속에 이 장랑이 가장 또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아무래도 우리나라나 중국의 유명한 궁궐 건축물들 모습이 대부분 비슷하지만, 호수 옆의 긴 이 회랑의 모습이 너무나 독특하고 독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이 긴 복도의 난간 위에 수많은 중국 여행객들이 걸터앉아 있다. 서태후가 산책을 즐겼다는 장랑의 처마 아래로는 수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나는 마치 화랑과 같은 이 복도 길을 산책하며 그림들을 감상했다. 그림 속에는 청나라의 황족들이 동경했던 정경들이 그려져 있다. 항조우의 서호, 각종 나무와 꽃이 어우러진 풍경, 서유기와 같은 고전과 각종 신화도 그려져 있다. 나는 이 복도에 서서 비오는 날의 곤명 호수를 바라보는 운치가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향각인공의 산 위에 만들어진 전각이 호수와 조화를 이룬다. ⓒ 노시경


나는 장랑을 걷기도 하고, 관광객들이 너무 많으면 장랑에서 내려와 호수 변을 걸었다. 계속 걸음을 걷다보니, 인공산이 눈앞에 들어왔다. 곤명호를 인공으로 파면서 만들어진 만수산(萬壽山)이다. 이 인공산 꼭대기 위에는 불향각(佛香閣)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곤명호와 인공산, 불향각이 어우러진 정경이 이화원 제일 경치이다. 그리고 불향각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화원의 정경도 일품이다.

석방 이 돌로 만든 배는 호수 위를 움직이지 못한다. ⓒ 노시경


우리 일행은 만수산 기슭을 따라 서쪽을 향해 계속 걸었다. 중국 역사책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유물 중의 하나인 대리석 배, 석방(스팡, 石舫)이 호수에 정박해 있다. 이 돌배가 돌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돌배 주변의 호수에 물결이 일면서 마치 배가 물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당시 중국에서는 황제만이 돌로 배를 만들 수 있었다. 건륭제(乾隆帝) 때 처음 만들어진 길이 36m의 이 돌배는 서태후가 당시의 프랑스 선박을 모방하여 외부를 아름답게 꾸몄다. 하지만 초록빛과 푸른색이 주조를 이루는 이 돌배는 주변의 붉고 노란 기운이 도는 기와 건축물들과 심한 부조화를 이룬다. 서태후는 이 부조화 속에서 달맞이를 하며 놀이를 즐겼다.

서태후는 1860년에 파괴된 이화원을 30년 만에 복원하면서 군비를 유용하였다. 원래 이 군비는 서유럽에서 전함을 구입하기 위한 군비였으나, 서태후의 전용으로 청나라의 군사력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 군비 유용은 그 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군대가 일본 군대에 대패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청나라의 패전은 외교적으로 청나라의 영향을 받던 조선에 일본 군대를 들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된다. 이화원을 중건한 역사가 조선의 역사에 미친 영향도 심대한 것이다.

북경 도심에서 멀지 않은 이화원의 하늘은 뿌연 편이다. 스모그 때문이다. 지금 같이 북경이 스모그에 덥히지 않았을 때의 이화원의 호수와 하늘은 정녕 아름다웠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넓은 호수와 전각에 지금같이 관광객들이 몰려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바다 같은 호수에 왕족과 신하 몇 명만이 거닐고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한적한 호수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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