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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는 순간, 분노·저항 아닌 슬픔"

[인터뷰]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돼 14일 석방된 사진작가 이시우씨

등록|2007.09.16 15:56 수정|2007.09.16 15:58

▲ 사진작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시우씨는 지난 4월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된 후 지난 14일 5개월여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15일 서울역 광장 국가보안법 폐지 집회에서 만난 이시우씨의 모습. ⓒ 오마이뉴스 선대식


"역사가 나를 관통한 느낌이었다."

지난 14일 보석으로 풀려난 사진작가 이시우(40)씨는 자신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씌워진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보석 석방에 대해 "뜻밖의 결과였기에 아직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면서 "바깥에서 많은 분들이 애써주셔서 나오게 됐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잠재되어 있던 국가보안법 폐지가 떠오르게 됐다"며 자신의 구속·석방의 의미를 전했다.

이씨는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민통선 평화기행> 등의 사진집·책을 내고, '한강에서 서해로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를 기획하는 등 사진작가이자 평화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이씨에게 국가보안법의 그림자가 드리운 건 지난 4월 19일. 그가 찍은 한강 하구, 미군 기지 관련 사진이 발단이 됐다. 이씨는 "그때 국가보안법이 아직까지 남아서 망령처럼 돌아다니다 길바닥에서 나를 덮친 느낌이었다"고 떠올렸다.

구속 직후 이씨는 옥 안에서 48일간의 단식을 이어갔다. 옥 밖에서는 '이시우 사진작가 석방대책위원회'가 꾸려지는 등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석방을 기원했다. 이씨는 "단식으로 죽을 고비를 두, 세 차례 넘겼다"면서 "밖에 계신 분들을 애타게 해서 죄송하다"고 전했다.

14일 갑작스레 보석 석방된 이씨는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져 재판부가 전향적인 결정을 한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한강 하구, UN사 문제 등에 관련된 글을 쓸 것이다"는 이씨는 "1~2달 안에 책을 볼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씨를 만난 건 15일 오후 3시 30분께 서울역 광장에서다. 이날 오후 4시로 예정된 국가보안법 폐지 집회 참석 차 강화도 집에서 서울에 나온 이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다음은 이씨와의 일문일답.

"이번 사건으로 제 삶의 중심으로 역사가 관통한 느낌이었다"

▲ 이시우씨가 아내 김은옥씨와 함께 15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벌어진 국가보안법 폐지 집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팻말을 들고 집회에 동참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선대식


- 보석으로 나오게 된 소감을 말해 달라.
"뜻밖의 결과였다. 기대를 못했다. 우선 이는 재판부의 전향적인 결정이다. 또한 바깥에서 저를 위해 애쓴 정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직 감정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 출소할 때 발걸음이 안 떨어졌다. 죽을 고생했었던 곳이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그 안에 있는 분들 놔두고 먼저 나와 마음이 무겁고 죄송스러웠다.

14일에 오종렬·정광훈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가 우연찮게 이번에 같이 나오게 됐다. 두 분과 같이 환영식을 거창하게 했다. 거기서 죽만 먹고 있는 회복 단계라 식사만 간단히 했다."

- 국가보안법 사건으로서 이번 보석 석방은 이례적인데.
"국가보안법 사건과 관련해 보석 석방은 드문 경우라고 알고 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면 다시 구속 판결을 내리는 건 쉽지 않다. 남북정상회담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재판부에서시대의 큰 흐름과 변화를 도외시하면서 재판을 끌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검찰도 민감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 현재 재판 과정은?
"검찰과 변호인의 심문이 끝났다. 지난주에 증거 채택 과정이 있었다. 원래 10월 19일이 구속 만기이기 때문에 그전에 판결이 날 예정이었는데, 구속에서 풀려나 판결이 늦춰지게 됐다. 현재 재판부가 제 입장을 긍정적으로 경청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경우 그렇지 않은데, 지난 7월 중순 3차 재판 이후 재판부가 바뀌고 나서 우리 얘기를 잘 들어주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석방을 위해 도왔다.
"우선 아내에 대해 놀랬다. 이런 잠재력이 있는지 몰랐다.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밖에서 아내가 움직였던 성과다.

또한 저는 사람 관계 맺는 걸 잘 못하는데, 이런 과정 겪으면서 많은 분들을 알게 됐다. 제 석방은 땀 흘린 분들의 노고가 100%였다. 잠재돼 있었던 국가보안법 폐지 요구가 이번 사건을 통해 터진 것 같다. 이번 사건으로 제 삶의 중심으로 역사가 관통한 느낌이었다."

"국가보안법이 망령처럼 돌아다니다 길바닥에서 나를 덮친 느낌"

▲ 인터뷰 도중 이시우씨가 웃고 있다. ⓒ 오마이뉴스 선대식

- 48일간의 단식을 어떻게 견디었나?
"사실 뜻하지 않게 단식에 들어갔다. 경찰에 체포되는 순간에 분노·저항이 아닌 슬픔이 몰려왔다. 국가보안법이 아직까지 남아서 망령처럼 돌아다니다 길바닥에서 나를 덮친 느낌이었다.

그 순간 입을 닫고 말도 닫고 먹지도 않았다. 단식 하다보니까 두, 세 차례 고비가 찾아왔다. 그때 '이게 죽음이구나'하고 느꼈다. 그 순간을 넘기니 견디게 되더라."

-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는데.
안에서는 밖의 일을 정확히 몰랐다. 재판과정 등을 통해 제가 얼마나 걱정을 끼쳤는지 알게 됐다. 그분들을 인질로 붙잡고 단식했던 것 같다. 애타게 해서 죄송하다."  

- 감옥에서 무슨 생각을 했나?
"단식을 접을 때쯤 구속돼있다는 게 제 마음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제 맘속에서 반성이 일었다. 정반대편의 우익단체 여러분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았다. 전쟁과 분단으로 비롯된 문제로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틀로 묶여 있다고 생각했다.

6월 6일 현충일이기도해서 단식을 접었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는데, 108배를 했다. 전쟁에서 비롯된 상처들을 내안에서 화해시킬 수 있는가 실험해 보고 싶었다."

- 감옥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책을 보고 글을 썼다. 전쟁과 관련된 책들을 서너 번씩 읽었다. 기소이유인 한강하구 문제, UN사 등과 관련해 출판 제안이 있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원고를 정리했다. 또한 재판에 필요한 것들을 썼다. 풀려날 때 보니까 수사 자료가 내 키만 하더라. 저에 대한 모든 부분이다. 제가 활동을 시작한 이후 모든 것들이 기소가 됐으니까. 거의 자서전 수준이었다."

- 정상회담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나?
"언젠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정말 되는구나'하는 느낌이었다. 평화체제를 의제로 삼는다는 발표를 봤는데, 저에 대한 기소 내용이 다 들어간 것이다. 평화체제는 국가보안법, 헌법 제3조의 영토조항, UN사, 미군기지, 한강하구 문제와 연관해서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회담 발표 후 재판할 때 검사에게 '절 기소한 내용들이 남북정상회담 의제로 정해졌는데, 이 지루하고 복잡한 재판이 무의미하고 쓸모없게 된 것 아니냐'고 물었다. 검사는 답이 없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책을 쓸 계획이다. 한강하구 관련 책은 지금 탈고 중이다. UN사 관련 책도 멀지 않았다. 1, 2달 내에 출간할 것이다. 이렇게 책을 써서 한강하구, UN사 문제, 미군 문제 등이 진척이 되고 현실에서 변화가 생기면 사진을 찍어야 할 대상이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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