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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와 고구마, 그리고 '나'라는 인간

"배워서 남 주니?"와 "배워서 남 주자!"의 차이

등록|2007.09.18 09:34 수정|2007.09.18 09:41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일이 잦아졌다. 전에는 한 번도 의구심을 품어보거나 호기심을 가져본 적도 없는 것들이 내 의식의 소매를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어제(16일)도 나는 저녁상 앞에서 수저를 들다 말고 문득 이런 생각에 빠져 들었다.

'여름 내내 땡볕을 견디며 자란 것들이 아닌가. 이 소복한 한 공기의 밥이 그렇고, 형형색색의 온갖 반찬들이 그렇고, 후식으로 내놓은 탐스러운 사과가 그렇지 않은가. 이 모든 것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인간인 나를 먹이고 기쁘게 하기 위해 저녁상에 올라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나눔과 비움의 거룩한 본을 보여주는 고마운 음식을 매일 같이 먹고 생명을 유지해가면서도 왜 나라는 인간은 늘 내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단 말인가.'
 
이런 내 마음을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적 상상력이나, 혹은 요즘 유행(?)하는 생태적 상상력으로 치부해버리면 할 말이 없다. 요즘 집으로 배달되는 문학잡지를 읽다보면 이른바 생태시라 일컬을 만한 작품들을 다수 만날 수 있다. 작가나 평론가들의 필력에 의존하는 특집도 생태 관련 글이 적지 않다. 그러니 저녁상 앞에서 그런 생각에 자주 빠져드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인지, 아니면 학습된 행위인지 아리송하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해도, 그런 생각들이 나의 삶에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가령, 다 늦은 오후 애호박이라도 하나 건질까 하고 산자락 밭에 갔다가 잠복해 있던 모기에게 된통 당하고 난 뒤에도 나는 모기를 원망하기는커녕 한 편의 헌시(?)를 써서 바칠 정도로 여유작작해졌다. 그 대상이 누구든 마음에서 원망이 사라진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잘된 일이 아닌가.    

손바닥만한 산자락 밭에 가서
호박 덩굴 조심스레 휘저으며
저녁상에 오를 애호박을 탐하다가
먼저 두어 방 물리다.

약이 오른 풋고추 따서
비닐봉지에 담다가 서너 방 물리고
풀이 절반인 부추 밭에 쪼그려 앉아
부추를 베다가 대여섯 방 더 물리다.

욕실에서 몸을 씻다가 보니
손목 발목 팔꿈치 정강이며
심지어는 엉덩이에 뺨따귀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덕분에 저녁상이 푸짐했는데
녀석들도
오늘 저녁상이 꽤나 화려했겠다. - 자작시, '모기에게 물리다'

'손바닥만한 산자락 밭'이지만 그 변변치 않은 좁은 땅에서도 상추, 쑥갓, 부추, 케일 등이 푸릇푸릇 자라고, 고추나 가지 나부랭이도 실하게 영글어 한 두 계절 넉넉히 저녁상이 제법 푸짐했었다. 그러니 어찌 '엉덩이에 뺨따귀까지/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모기의 소행을 괘씸하다고만 여길 수 있겠는가. 녀석들도 가끔은 우리 인간들처럼 화려한 저녁상을 받고 싶었을 터인데.   

손바닥만한 밭이니 농사랄 것도 없지만, 농약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짓다보면 고추고 깻잎이고 영 때깔이 나지 않는다. 특히 즙으로 갈아먹거나 쌈 싸먹기에도 좋은 케일은 이파리가 거지반은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다. 자주 밭에 나가 벌레를 잡아 죽여야 하는데 그럴 짬도 없지만, 우선 마음이 내키기 않는다. 그래서 아예 절반은 벌레 몫으로 하고 절반만 거두어드리자고 마음을 먹으니 골치가 아프고 말 것도 없었다.       

학교에서도 나는 학생들과 공존의 방식을 선택할 때가 많다. 수업시간에 교사는 학생들이 정숙해주길 바라고, 학생들은 그런 교사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마냥 떠들어댄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공부에 취미가 없는 아이들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해당과목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의 잘못일까? 교사의 잘못일까? 나는 반반으로 본다. 원인이 반반이니 그 해결책을 모색해야할 책임도 절반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순천지역 '아이들의 인격을 키워주기 위한 교사 소모임'이 선정한 9월의 책 제목은 <행복, 그게 뭔데?>(낮은산)이다. 그 책을 읽다가 나는 문득 '자기결정력'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부모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학대와 저주를 받고 자라는 한 아이의 행복에 대한 자기결정력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들의 이야기 속에는 필연적으로 학교이야기가 나온다. 그들 눈에 비친 학교의 풍경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집에서 불행한 아이는 학교에서도 불행한 시간을 보내기 일쑤이다. 학교는 그들을 살피고 안아주고 도와주는 공간이 결코 아니다. 학교가 아이들을 도와주는 곳이어야 함에도, 학교에 도움이 안 되는 아이들에 대한 소외의 차가운 시선은 끔찍하기만 하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 저 불행한 아이가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이라도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 나는 저 아이에게 과연 어떤 모습의 교사일까?'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지만 착하고 모범적인 아이, 우리 교사들은 그런 아이에게만 사랑의 시선을 던질 줄 안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착하고 모범적일 확률은 매우 적다. 그들에게 넉넉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교사의 어진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학교와 교육, 그리고 한 아이를 바라보는 정확한 관점과 지속적인 실천을 담보할 수 있는 연대가 필요하다. 나눔과 비움의 철학을 실천하는 학교공동체라고나 할까? 

내가 아는 후배 교사는 담임을 맡을 때마다 매번 급훈을 '배워서 남 주자'라고 정한다고 한다. 흔히 부모들이 자녀에게 공부하기를 권하면서 후렴처럼 뒤에 갖다 붙이곤 하는 '공부해서 남 주니?'를 살짝 비틀어 패러디한 셈인데, 그 내용은 정 반대다. 그런데 배워서 남 주자니? 왜 애써 배워서 남 좋은 일을 한단 말인가?

언젠가 나도 그런 비슷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잘 삶아진 고구마의 껍질을 벗기고 노랗고 포근포근한 속살을 맛있게 탐하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넌 왜 애써 자라서 남 좋은 일만 하는 거냐?"
"아저씨도 저 맛있게 먹고 남 좋은 일 하시면 되잖아요."
"그래, 그러면 되겠네."

고구마가 입을 벌려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겠지만, 그날 나는 분명 고개까지 끄덕이며 그렇게 대꾸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비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남을 배려하는 일에 서툴기만 하다. 가끔은 그런 내 자신이 싫어서 나를 들볶기도 하지만, 그런 고뇌의 순간조차도 결국은 나를 위한 시간일 때가 많다. 고구마처럼 군소리 없이 소화되어 남의 살이 되어준다는 것이 나에겐 불가능한 일로만 느껴진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저녁상 앞에서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식탁에 놓인 음식만큼만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월간지 <새가정>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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