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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 말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구나!

선종 고승들에게서 배우다

등록|2007.09.18 12:05 수정|2007.09.18 12:19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선종 불교의 고승들처럼 괴상한 사람들도 드문 것 같다. ‘선문답’이라는 단어로도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우리 ‘정상인’들이 보기에 그들이 하는 말이나 하는 행동은 모두 괴상하기만 한 것,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미치광이 같은 것 뿐이다. 예를 들어 10세기 중국에서 이름을 떨쳤다는 법안문익(法眼文益)이란 승려는 상대가 질문을 하면 그 말을 그대로 대답으로 돌려주는 방식, 이른바 중복법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원(曹源: 선종 불교의 성지)의 물 한 방울입니까?”
 ”조원의 물 한 방울이다.”

 법안은 특히나 별난 경우지, 대부분의 고승이란 사람들 이야기가 이렇다. 어떤 이는 갑자기 물어본 사람을 때리거나 사납게 밀어버렸다고 한다. 또 다른 이는 갑자기 버럭 고함을 지르거나 상대에게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런 걸 답변이라고 하는 승려들도 미치광이같지만, 더 웃기는 것은 질문한 사람이 이런 대답 앞에서 ‘깨우쳤다’ 하며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승려보다도 더 미치광이같다. 그런데 대부분 선종의 일화를 보면 꼭 이런 식의 결말이다. 마치 움베르토 에코라는 사람이 쓴 소설 <푸코의 진자>에 나오는 신비주의 비밀결사 단원들처럼, 이 사람들도 남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들만의 비밀 암호로 뭔가 중요한 정보를 주고받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도 든다.

 그러나 이런 승려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같은 방법을 써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걸 보면, 암호설은 그다지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런 말이나 행동 자체가 애초부터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 원래 ‘정상인’, 즉 우리 대부분의 사람이 말을 하거나 어떤 표정을 짓거나 몸동작을 할 때, 그 신호들은 그의 특정한 의지와 사상 또는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말로 하는 대화든, 아니면 몸동작이나 눈빛이든 말이다. 사람이 생존의 필요 때문에 여럿이 모여 살게 되면서, 이런 신호들을 주고받아 서로 필요한 걸 교환하게 되니, 그 주고받음에도 일정한 법칙과 질서가 생기게 된다. 누군가가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면 기분이 불쾌하거나 몸이 안 좋다는 신호고, 거기에는 ‘나는 지금 기분이 안 좋으니 함부로 하지 말라’는 다른 사람을 향한 신호가 담겨 있다. 또는 상황에 따라 다른 신호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이런 관습과 법칙에 전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순서도 없고 일정한 방향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입 밖으로 내는 음성 신호는 있으나 그게 가리키는 사물이나 사상은 없다. 그 때 사람들은 그를 ‘비정상’, 더 솔직히는 ‘미치광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따진다면, 선가의 승려들은 거의 다 미치광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어떤 논리도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난센스 퀴즈 같은 단어의 나열일 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뭔가 깨달았다고 한다. 이들이 짜고 하는 사기꾼이나 저능아, 바보같지는 않다. 즉 애초부터 말이나 몸짓은 중요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불가에도 ‘이심전심’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질문자와 고승의 마음 사이에 뭔가 심오한 정신의 교류 같은 게 생겨 그걸로 진리를 전할 수 있다면(또는 깨닫게 도울 수 있다면), 말이나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 고작해야 상대가 집중할 수 있도록, 정신의 ‘주파수’를 맞추도록 자극을 주는 도구일 뿐인 것은 아닐까?

 선종의 시조인 달마가 후계자를 정하고자 했다. 그는 ‘비움’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여러 제자들은 오랜 수련과 사색을 거쳐 터득한 자신만의 철학을 유창하게 논했다. 그러나 달마의 표정은 신통찮았다. 마지막에 혜가라는 제자에게 질문하자, 혜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달마에게 절을 했다. 달마는 그에게 자신의 법통을 잇게 했다.

 혜가의 이런 모습이 선종의 중심 사상을 가장 간단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승려들은 진리를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사실 우리도 살다 보면 느끼게 된다. 말이란 것이 정말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란 사실 말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말하기’라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어떤 방면에서 생각해도 문제가 없는 말을 한다는 게 너무 어렵다는 걸 생활 속에서 느끼게 된다.

 언어만이 아니라 인간 문화의 모든 ‘표현’이 그렇다. 행동거지, 그림이나 음악, 춤과 율동, 영상 문화 등이 모두 그렇다. 과장 좀 해서 백지에 점 하나만 찍은 걸 그림이라고 내놓아도, 정치인, 종교인, 예술가, 학자, 여성운동가, 동성애 운동가, 인권운동가, 미디어 연구자에서 파시스트나 정신병자까지, 수백 가지 방면에서 그 숨은 의미를 들춰내며(그런 것이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작자가 그 해석들을 듣고 기절초풍할지도 모르겠지만) 트집을 잡고 멋대로 의미 부여를 하는 게 요즘 세상이다.

 이런 상황인데 ‘진리’라는 걸 아무리 그럴 듯한 말과 온갖 어려운 개념으로 설명하려 그래도 머리만 아플 뿐이다. 결국 백가지 사람이 있으면 모두 다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진리를 만들어버리는데, 그 많은 학설과 개념, 말의 잔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어떤 말을 해도 결국 어느 부분에선가는 문제점과 모순이 생긴다면, 언어와 개념으로 누구에게나 타당한 진리를 말하겠다는 것은 그저 만용인 것은 아닐까? 선종의 승려들은 일찍부터 이 것을 깨달은 게 아닐까. 말은 결국 우리 육체의 속박일 뿐이고, 진리를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초라한 도구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 사실 불교 뿐 아니라 기독교의 경전에서도 신(=진리)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너희가 어떻게 나를 알 수 있겠느냐?’

 스스로 어떤 이론을 만들어내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또는 ‘우주는 이렇다, 인간은 이렇다, 니가 지금 이러이러는 건 저러저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순간,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그것은 ‘흔들릴 수 없는 진리’, 좋게 말하면 확신, 솔직히 말하면 독선이 된다. 자신이 소위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정도의 차이일 뿐 독선과 오만은 반드시 생겨난다. 기독교도, 불교도, 도교도, 공맹도, 마르크스 사상과 무정부주의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고작해야 우주 전체로 보면 밤톨만한 별에 사는 먼지가 우리 인간인데, 신을 논하고, 진리를 말하고, 세상이 움직여지는 걸 논하다니! 건방진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결국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 본래의 이런 한계 때문에 ‘궁극의 진리’, 보편적인 어떤 것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무작정 ‘이것도 저것도 나는 반대’ 또는 ‘좋은 게 좋은 거’ 식으로 빠지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선종 고승들처럼 강한 '내공'이 있다면 모를까 말이다. 제아무리 자기는 세속을 떠나 무아지경의 상태로 살겠다고 해도, 그가 인간으로 사는 이상 그의 그런 행동까지도 결국 세상에 일정한 영향을 주며, 일정한 정치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왕 지구 위에서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답은 찾을 수 없어도, 작은 부분에서 사소한 법칙과 도덕이라도 찾으면서 계속 사는 것,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렇게 지혜롭고 공평하지는 않을지라도 세상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고 글쓰는 것이, 천사도 신령도 아니요, 영장류의 살가죽을 뒤집어쓰고 살아야 되는 보통 사람인 나의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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