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주장] 군 복무를 희생 아닌 기회로 만들어야

'양심적 병역거부'가 아니라 '신념에 의한 병역회피'다

등록|2007.09.18 15:55 수정|2007.09.18 17:02
종교적 또는 양심적인 사유로 입영을 기피하는 사람들에게 이르면 2009년부터 대체복무가 허용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대체복무 대상은 전남 소록도의 한센병원, 경남 마산의 결핵병원, 서울과 나주, 춘천, 공주 등의 정신병원 등 9개 국립 특수병원과 전국 200여개 노인전문요양 시설 등 강도가 높은 곳으로 하고 근무연한도 육군 현역병의 두 배인 36개월로 한다고 한다.

이 문제는 소위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이름으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데 문제를 이성적으로 다루려면 문제를 표현하는 용어가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병역 거부 문제는 ‘양심’이라는 용어가 불필요하게 감정을 자극한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는 영어 'conscientious objection'의 번역어다. 'conscientious'의 명사형인 'conscience'는 흔히 ‘양심’으로 번역되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conscience'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반면 우리말 ‘양심’은 대체로 모든 사람에 공통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의 “양심”도 번역어다. 그래서 헌법학에서 말하는 양심과 일반 국민이 느끼는 양심이 일치하지 않는다. 헌법학에서 양심이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로 정의된다 (김두식,『평화의 얼굴』, 40면). 간단히 하면, 헌법의 양심은 ‘인격을 건 신념’이라는 뜻이다. 이럴 때 용어를 고쳐야 하는 쪽은 국민이 아니라 헌법과 헌법학자다.

이런 차이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는 네가 양심적이라면 군대 가는 나는 비양심적이란 말이냐?”라는 반발이 생긴다. 번역이 낳는 소모적인 논란이다. 처음부터, 감정이 개입되기 쉬운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표현 대신 ‘신념에 따른 병역 회피’라고 표현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신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쟁점이 ‘병역 기피가 양심적인가?’가 아니라 ‘병역 회피라는 신념은 헌법 제19조의 보호 대상이 되는가?’로 설정되어 이성적인 토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사람 모두가 평화를 간절히 원하고 그래서 아무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게 확실하다면 군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간이 (적어도 일부 인간이) 생존 극대화라는 저급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필요의 악으로서 군대를 인정한다. 또 모든 나라에서 병역 거부자가 동시에 늘어나서 각국의 군대가 같은 비율로 줄어든다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병역 거부 문제는 기독교 일부 종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설령 세계인이 빠짐없이 기독교인이 되더라도 군대가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마저 돌려대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끼리 싸운 참혹한 전쟁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침공에 적극적이듯이, 신자라고 해서 모두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은 아님을 서로가 잘 알기 때문에 군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실정이 이런데 어떤 사람이 이유야 어떻든 병역을 거부한다고 나서면 일반인이 시선이 고울 리 없다. “누구는 전쟁이 좋아서 군에 가는 줄 아느냐?”, “네가 군에 안 가면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하는데 너무 이기적이 아니냐?”와 같은 반응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병역 거부 단체와 개인이 국민의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 하나는 소극적인 거부에 그칠 것이 아니라 병역이 필요하도록 하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세계평화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군 입대자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징병제에서는 누군가 입대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대체로 형편이 더 나쁜 사람이, 입대해야 한다. 의도하든 안 하든 자기가 싫은 일을 남에게 미루게 된다는 것이다. 거부자가 기독교인일 경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는 성경의 황금률을 결과적으로 어기게 된다. 이런 노력과 배려 없이 “나는 빠질 테니 국방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해라”고 하는 것은 성숙한 모습이 아니다.

신념에 따른 병역 회피를 인정할 경우 군 입대자와의 형평성을 생각하면 대체복무제를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대는 전쟁을 위해 존재하고 전쟁이 나면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데 형평성 있는 대체복무가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해소할 수 없다. 평시에는 몰라도 전시에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대체복무보다는 군 복무자 우대가 근본 해법이다. 군 복무를 “박박 기고 푹 썩는” 희생이 아니라 젊은이가 부러워하는 기회가 되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군대를 좋은 직장으로 만들어 지원제를 실시하면 병역 회피라는 문제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흔히 모병제라고 하지만 징병제에서도 모병을 하니까 ‘지원제’가 더 정확한 명칭이 아닐까?) 징병제가 불가피하다면 복무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고, 군 복무에 따른 희생 역시 보훈제도나 정부가 부담하는 보험으로 충분히 보상해주어야 한다.

이런 제안에 대해서는 ‘그런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나?’하고 걱정부터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두 가지 해법이 있다. 첫째로, 세금을 올리지 않으려면 정부지출 가운데 우선순위를 높이면 된다. 국방이 나라의 존립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다른 용도가 많기 때문에 군 복무자 우대에 예산을 배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일부 국민의 희생으로 때웠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갈 수는 없다.

둘째로, 다른 용도의 예산을 축내지 않으려면 증세를 하는 수밖에 없다. 토지보유세를 올려서 부동산 투기를 잡는 동시에, 토지를 지켜주는 의무 복무자의 보수를 대폭 올려주는 방법이 있다.
덧붙이는 글 김윤상 기자는 경북대 행정학과 교수입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