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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에 매혹되는 3가지 이유

문제는 '다시,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게 아닐지

등록|2007.09.18 17:13 수정|2007.09.18 18:11

▲ 최근 독자들 사이에서 '역사소설 열풍'이 뜨겁다. 이 열풍의 중심에 선 작품들. ⓒ 각 출간사


68혁명, 거리에 섰던 그 청년들은 어디에

1968년 프랑스 파리. 일군의 청년들이 체 게바라와 모택동의 얼굴이 프린팅된 광목 깃발을 들고 함성을 내지르며 거리를 내달렸다. 그들이 외친 것은 기존 권위질서에 대한 온전한 거부, 해묵은 제도에 대한 완곡한 부정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를 가진 열 아홉 대학생의 입에서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수치스런 과거를 극복하고 빛나는 미래를 가져오자." 전 유럽을 변혁의 일념으로 끓어오르게 만든 언필칭 '68혁명'이었다. 그들이 내세운 슬로건은 은유적이지만 강렬했다.

"압제의 계단을 내려서면 자유의 모래밭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 슬로건은 30년 세월이 흐른 뒤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의 <69>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외쳐진다. 빛나는 청춘을 담보해 그들이 부정하고 싶었던 과거. 지나온 역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39년 전 파리의 광장과 골목을 점령했던 십대의 청년들은 이제 육십에 가까운 노인이 됐다. 바로 그들이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전반에서 그들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권위질서'와 '해묵은 제도'가 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묻자. 1968년 유럽과 2007년 유럽은 어떻게 다른가? '아버지'로 상징되는 권위와 낡은 제도의 목을 친 그들은 오늘 행복한가? 그 행복은 39년 전의 행복과 어떻게 변별되는가?

문화대혁명, 오늘 '인민'은 행복한가?

1960년대 시작, 70년대까지 이어지며 중국을 공포와 광기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숭배를 강요하며 권좌를 지키던 모택동 주석의 어록을 든 홍안의 소년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마땅한 구악들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소년들이 내뻗는 매운 폭력엔 어떤 죄의식도 주저함도 발견되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두드려 맞아 피 흘리는 구악들이 기실은 그들을 낳고 키운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맞다. 폭력의 표적이 된 지주와 지식인계급은 홍위병들에게 새롭게 건설될 평등 조국과 인민의 나라를 악의적으로 뒤흔들 청산의 대상, 즉 지나간 역사에 불과했다.

과거에 대한 끊임없고 지속적인 부정. 그 부정을 통해 얻어낼 '평등'이란 물적 토대. 그러나, 보라. 수천 년 세월을 통해 축적된 문화예술과 지식을 그토록 짧은 시간 내에 거세시킨 중국의 오늘을.

당은 타락했고, 당의 관료는 부패했으며, 그 부패와 타락이 절대다수 인민의 극단적인 궁핍을 가져왔다.

이게 홍위병들이 주석으로부터 약속 받았던 이른바 '인민들이 주인인 평등조국'인가? 그렇다. 역사를 난잡스런 과거만으로 치부했던 만풍과 만행은 파멸을 부를 뿐이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배운 역사의 교훈.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서설이 길어졌다. 이제 단도직입하자. 요 몇 년 새 한국에서의 '역사소설 바람'은 그 뜨겁기가 활화산이 용암을 쏟아내는 지역의 열기 같다.

학생들은 물론, 오전 9시에 출근해 설렁탕이나 자장면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 6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반복된 일상의 샐러리맨, 거기에 자영업자와 주부들까지 언필칭 '역사소설' 한 권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젠 누구도 책 속에서 진리와 길을 구하지 않는다"는 자본만능, 인터넷만능 시대에 참으로 기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역사소설 독서에 그토록 열광하는가. 질문에 대한 답부터 미리 이야기하자면 '역사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다.

앞서 장황하게 언급한 '68혁명'과 '문화대혁명'의 전개과정과 결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렇다. 역사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조합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선 합리적인 근거의 제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아닌가.

한국의 '독서가'(표현이 지나치게 직설적이지만 어쨌건)들이 역사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확신케 해주는 가장 명료한 근거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이런 거시적인 해석은 재미가 없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그랬던가. "인간은 큰 담론보단 세세한 잡담에 집착하는 존재"라고. 하여, 지금부턴 역사소설이 독자를 매혹시키는 시시콜콜하고 미시적인 이유 3가지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역사소설을 읽는 3가지 즐거움

▲ '역사소설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소설들. ⓒ 각 출간사


영웅 없는 시대는 영웅을 갈망하게 만든다. 지난 몇 십 년간 혁명은 고사하고 그 흔한 변란 하나 없었던 한국사회. 힘의 부재와 그 힘을 통해 빛나고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올 사람의 부재. 거기서 파생한 결핍감은 독자들로 하여금 지난 시대 역사 속 영웅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 결핍감과 그리움을 유효적절하게 위로해준 소설이 김훈의 <칼의 노래>와 한승원의 <추사>, 김홍신의 <대발해>, 김별아의 <논개> 등이다.

이들 작품은 이순신과 김정희, 대조영과 논개 등 역사 속 인물의 행적을 현대 독자의 입맛에 맞게 재조명해냄으로써 이른바 '역사소설 열풍'의 견인차가 됐다. 중견작가들이 자신의 붓 끝으로 다시 탄생시킨 '영웅 전설'은 영웅 부재의 시대를 사는 독자를 잠시나마 충일의 감정으로 이끈다. 행복한 대리만족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무게감에 김훈 특유의 온몸 던져 만든 엄정한 문장, 한승원과 김홍신의 유려한 서사성이 더해진 이들 소설의 인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렇다. 우리가 역사소설에 매료 당하는 첫 번째 이유는 스스로 영웅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 앞서도 언급한 바 사람은 '세세한 잡담'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동물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라. 외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그녀에게 갖가지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혼곤한 잠에 빠져들던 행복감이 떠오를 것이다.

맞다. 누구나 옛날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도 미시적이고 상세한 이야기를. 바로 이 시시콜콜한 작은 이야기에서 착안해 축조된 작품으론 신경숙의 <리진>, 전경린의 <황진이>, 김탁환의 <리심>, 이수광의 <왕과 나, 김처선>, 조두진의 <도모유키>, 김훈의 <남한산성>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조선 궁정에서 춤을 추던 여자가 프랑스 외교관의 연인이 되어 파리로 갔다거나(리진), 남성의 생식기를 상실한 비루한 사내들로 치부되던 내시가 기실은 막강한 권력의 배후 실세였다거나(왕과 나, 김처선),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장수에게도 인간적 고뇌와 연민은 있었다(도모유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 작품들의 출발은 대부분 옛날에 씌어진 책 속에서 발견되는 '작고 세세한 문건' 혹은, '시시콜콜한 짧은 기록'에서 시작됐다. 김훈의 <남한산성> 역시 거대 역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것만이 아닌 미세한 인간의 감정을 포착해내는 세련된 문체까지 작품 속에 투여함으로써 독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젠 마지막 이유가 남았다. 독자들이 역사소설에 매혹 당하는 세 번째 이유.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시대에 뜬금없는 소리일 수 있지만, 사람들이 옛날 이야기만큼이나 좋아하는 게 '다른 나라 이야기'다.

미지에 대한 들뜬 궁금증과 호기심. 그 미지의 땅이 지금 당장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닿을 수 있는 현재의 장소가 아닌 과거의 어떤 곳이라면 큰 폭으로 상승하는 호기심 또한 불문가지다.

그 이름도 생경한 '용설란' 농장에서 노예노동의 간난신고를 겪어야 했던 멕시코 이민 1세대의 척박한 삶을 그려낸 김영하의 <검은 꽃>과 전쟁이란 괴물이 만들어낸 불행한 한국인 떠돌이가 어떤 경로를 통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나치의 군복을 입은 채 체포되었는지, 그 궤적을 추적한 조정래의 <오 하느님>은 역사가 인간에게 강제한 '슬픈 여행길'로 독자들을 이끈다.

두 작가의 유포한 카타르시스에 중독된 이들도 앞서 열거된 역사소설 독자 못지 않게 많다. 화자의 입장이 외국인으로 바뀌어 전개되는 것이지만 김경욱의 소설 <천년의 왕국> 역시 넓혀진 시각으로 보자면 바로 이 세 번째 매혹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역사소설도 좋고 아니라면 어떤가... 이 가을, 책을 읽자

선선한 바람의 냄새가 코끝을 스쳐간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폭염이 고개를 떨구는 순간, 기어코 가을은 왔다.

역사소설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떨까. 우리가 텔레비전과 영화에 바치는 정열의 백분의 일만 책에게 돌려주자. "인간이 책 외에 무엇을 통해 세상을 배우겠는가"라는 말의 의미가 새삼스러운 오늘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격주간 < SKOOB> 5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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