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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누가 오시려나

[북한강 이야기 260] 그리운 것들은 산 밑에 있다

등록|2007.09.20 13:41 수정|2007.09.20 15:22
지금 고향 앞마당과 뒷동산엔 그리운 것들과 추억들이 주렁주렁합니다. 조롱박, 밤, 대추, 사과, 배, 알밤들마다 자신을 통통 채워놓고는 들머리를 향해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 누가 오시려나.

풋풋한 감이 탱탱하게 익어갑니다. ⓒ 윤희경


해마다 조롱박을 앞마당 울타리에 가득 심어놓고 긴 여름을 보냅니다. 오후 5시경에 하얀 꽃물이 꿈처럼 피어나면 보리쌀 담글 시간이지요. ‘아가야, 보리쌀 담가 앉혀라’던 그 옛날의 어머니 목소리도 듣고 한밤중 달이라도 떠오르면 하얀 달빛을 쏘이며 긴긴 추억의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올해도 조롱박이 조롱조롱합니다. 이 가을 나를 찾아 앞마당을 찾아오는 첫손님께 뜰 밖 샘터 샘물을 조롱박 가득 떠다 바치고 싶습니다.

조롱박우리집을 찾는 첫 가을 손님에게 옹달샘을 채워드리지요. ⓒ 윤희경


세찬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언제인 듯싶게 조용한 아침이 열리고 있습니다. ‘툭툭’ ‘후드득’ 알밤들이 몸을 벗고 있습니다. 긴 장마와 무더위를 견뎌낸 밤알들, 살이 통통 올라 매끈매끈합니다. 조선낫과 양파자루를 들고 알밤을 주우러 뒷동산에 올라갑니다. 풀숲을 헤치며 까마득한 추억들을 한 알 한 알  주워 담습니다. 금세 호주머니가 불룩해오며 그리움 같은 것들이 가슴가득 밀려옵니다. 무얼까, 가을이 성큼 다가와 울컥거림이 거기에 서 있습니다.

알밤알밤이 후두둑 옷을 벗는 계절입니다. ⓒ 윤희경


나보다 부지런한 첫손님들의 아침 식사가 한창입니다. 청설모와 다람쥐입니다. 청설모는 언제 보아도 날씬한 몸매, 탐스런 꼬리,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밤나무 잎 틈새를 뛰어다니며 밤들을 입안가득 따 물고 오물오물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이 녀석은 탱탱하고 잘 생긴 것들만 골라 대충 씹어선 뱉어버리는 통에 얄밉기 그지없습니다. 또 때로는 빈 밤송이를 흔들어 떨구며 할금할금 사람의 약을 올려놓기도 합니다.

밤송이우측 맨 아래가 청설모가 먹다 버리 밤입니다. ⓒ 윤희경


다람쥐는 언제나 가까이 다가섭니다.

“다람쥐야, 안녕.”
“네, 아저씨도 안녕하세요.”

“많이 주었나 보구나.”
“네, 부지런히 주워 다 땅 속에 묻고 대문을 닫아 갈무릴 해야지요.”

“넌, 조만한 것만 줍는구나.”
“네, 큰 건 아저씨 가지세요. 추석 선물로….”

“넌, 참 맘씨도 곱구나.”
“아녜요,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가 나나요, 조금씩 나눠 가져야지요.”

“아, 네가 나를 가르치는구나.”
“아저씨, 매끈하고 잘 생긴 몇 개는 남겨놓으셔요.”

“?….”
“물어다 땅 속에 묻어놔야 새싹을 틔워내지요.”
“아! 너, 대단하구나.”


그랬다. 혼자만 잘 살면 뭐가 재미있으랴. 조금씩 나눠 먹어야 세상 살맛이  나지. 추석 때 쓰려고 배를 몇 개 따지 않고 그대로 뒀더니 까치들이 달려들어 단물을 쪽쪽 빼먹습니다. 까치들은 농부에겐 원수나 매한가지입니다. 뭐 하나 제대로 남겨두는 일이 없습니다. 포도, 배, 대추, 수수 등 닥치는 대로 해치웁니다. ‘그래, 혼자만 잘 살면 뭐해, 같이 먹고 살자’ 해보지만 까치들은 내 맘을 알고나 있는지 여전히 까-각-깍 속을 훌렁 뒤집어 놓습니다.

▲ 까치가 단물을 빨아 먹고.. ⓒ 윤희경


아침마다 벌레 먹은 사과 하나를 따 한 입 물컥 베어 물어봅니다. 단물이 입안 가득 고여 와 ‘잠자는 뇌’를 흔들어 깨워놓습니다. 모든 과일이 다 그렇듯 아침에 먹어야 정신이 맑아지고 뱃속이 편안해옵니다. 예부터 사과를 아침에 먹으면 금, 저녁에 먹으면 독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벌레 먹은 사과를 따 한 잎 베어 물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일, 내 행복의 시작입니다.

▲ 사과는 아침에 먹어야 제 맛 ⓒ 윤희경


아, 누가 오시려나.
대추 볼이 점점 붉어가고 감들도 풋풋하게 살이 올라 그리운 이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오려나, 나도 자꾸만 동구 밖을 내려다봅니다.

▲ 고향 앞마당엔 대추볼이 붉게 물들어갑니다. ⓒ 윤희경

덧붙이는 글 다음 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북한강이야기 또는 윤희경 수필방을 치고 찾아오시면,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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