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가을 들녘에서 희망을 보다
더 늦기 전에, 어서 빨리 펜을 잡아야겠다
▲ 물 속에 잠긴 벼들가을 들녘의 벼들이 태풍을 맞아 쓰러지고 물 속에 잠겨버렸습니다. 절망과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이러한 때에 어떤 생각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아무런 것도 건져 올릴 게 없는 무전답자들을 생각하면 그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희망을 품고 힘을 내십시다. ⓒ 권성권
그렇지만 물 논 속에서 한 움큼 나락이라도 건져 올리듯 쓰라림 속에서도 뭔가 건져 올릴 교훈이 있지 아니할까? 이 땅에 행하는 모든 일들이 자업자득이듯 인간 스스로 환경 재앙을 불러온 꼴이라 여기는 그런 깨우침. 껴입을 옷조차 남아 있지 않은 가녀린 사람보다 아직은 벗어 놓을 옷가지라도 남아 있는 나 자신이 그 피해 대상이 되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 일들. 오히려 그런 마음들이 삶을 살갑고 따뜻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나도 한때 사람 사이에 뒤틀린 일로 무척이나 고생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그분도 오해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서로 불편한 관계로 전락했다. 마치 큰 나무를 심고 많은 열매를 거둬들이기 위해 밑거름을 주는 단계였는데, 그것이 그만 뒤틀려 버렸다. 어쩌면 서로 자신이 맡은 역할분담 차원이나 서로 자신이 보는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더 정확하게 꼬집는다면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지 못한 관계의 부족 때문이었다.
▲ 절망 속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의 뭉게구름물속에 잠긴 벼들 위에 떠 있는 하늘의 흰 뭉게구름입니다. 희망은 그렇듯 멀리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힘이 들겠지만 희망은 절망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물론 내가 하고 있는 일들도 그럴 것이고, 어딘가 뒤틀려 있다면 관계의 부족, 배려의 부족에서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가을에, 서로가 관계를 회복하고 또 희망을 주는 편지를 써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 권성권
돌이켜 보면 그리 큰일도 아니건만 왜 그땐 자존심을 세우기에 서로 바빴는지 모르겠다. 서로가 반 보씩만 양보하고 배려했더라면 좀 더 그 문제가 쉽게 해결됐을 텐데. 나이도 한참 어리고 그 일에 초짜였던 내가 능숙한 그분에게 좀 더 맞추려고 했더라면 더 알찬 열매들을 거둬들였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자니 그저 아쉬움만 가득하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열매보다는 동기와 과정이 순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지금껏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그분과 관계 맺고 살아온 지난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니 문뜩 반성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굳이 이철환님이 쓴 <반성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내가 그분에게 써야 할 한 장의 편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길고 긴 문장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 아니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저 내 속에 담긴 순수한 마음을 그 글 속에 담는 것이면 족할 것이다. 그것이면 내 마음을 전달하는데 충분할 거라 나는 믿는다.
그러면 그때 비로소 나와 그분 사이에 얽힌 관계도 스르르 풀리고 회복될 것이다. 논 속에 잠겨 있는 벼들을 건져 올리듯, 황폐한 가을 들녘 하늘 위에 떠 있는 새하얀 뭉게구름을 펼쳐 보듯이.
더 늦기 전에, 어서 빨리 펜을 잡아야겠다. 흰 종이 위에 내 마음을 담아 한자 한 자 또박또박 써야겠다. 그 생각을 하자니 참담한 가을 들녘 하늘에 새하얀 희망의 구름이 피어오르듯, 벌써부터 내 속에 새로운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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