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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의도일까?

추리무협소설 <천지> 278회

등록|2007.09.21 08:18 수정|2007.09.21 08:24
다가오는 용추의 시선에는 다소 의외라는 듯한 기색이 담겨있었다. 함곡 혼자라니. 용추의 뒤를 이어 다가오는 다른 인물들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저 여우같은 자식이 무슨 수를 쓰려는 것일까?

“기다리다니...무슨 말씀을? 나는 당신이 이곳까지 오지 않기를 바란 사람이오.”

함곡은 매우 태연했다. 어림잡아 거의 삼십 명에 육박하는 인물들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예측하지 못한 비상한 대책이라도 세워놓은 것일까?

함곡에게 남은 다른 수가 무엇일까? 지금 저렇게 혼자서 자신들을 맞이하리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이 좁은 운중보 내에서, 그리고 이제 밝혀질 것은 거의 다 밝혀진 상태에서 아직까지 함곡이 남겨둔 수가 있기는 한 것일까?

함곡이 천변지복(天變地覆)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은 인정하고 있다. 허나 그런 함곡이 들고 나올 여러 가지 패를 예상해 미리 제거하거나 대비한 용추로서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애써 자신감을 가지고자 노력했다.

“천하의 함곡이라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군. 홀로 우리를 맞이하는 허장성세를 보이니 말이네.”

“허! 그런 사실을 한눈에 간파하셨단 말이오?”

함곡은 이상하게도 느물거리고 있었다. 함곡은 냉소적인 말투나 모습을 보인 적은 있어도 저런 식의 태도는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용추를 놀리는 듯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용추는 함곡을 주시하며 뇌리를 빠르게 굴렸다.

‘함곡의 의도가 무엇일까?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시간? 시간을 벌고자? 아니면 남은 인물들이 주위에 매복해 있으면서 한 순간에 기습을 하고자?’

그러나 그 정도는 이미 대비하고 있다. 어수선하게 몰려 서 있는 것 같지만 이미 용추는 대열을 정비하고 일종의 진(陣)을 형성해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아니 시간, 시간을 벌고자 함이다. 누군가, 아니 원군(援軍)을 기다리고 있는 것? 그래서 시간을 벌고자 하는 것이고?’

상대의 의도를 알기 이전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대부분 모사(謀士)들의 공통점이다.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먼저 움직이면 손해를 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경우는 다르다. 지금 이러한 상황은 함곡이 만들었고 지금 아주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용추는 내심 결론을 내렸다. 움직여야 한다. 아니 건드려 보아야 한다. 

“자네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지금 무척 다급하군.”

말과 함께 용추는 고개를 뒤로 돌려 흑백쌍용을 향해 손짓을 했다.

“다치게 하는 일 없이 고이 모시도록.”

생포하란 말이다. 흑백쌍용은 용추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 순간 상만천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멈추거라.”

흑백쌍용이 움직이는 순간 함곡 뒤쪽의 살기가 더 짙어졌기 때문이었다. 상만천은 이미 이곳에 오는 순간 함곡의 좌우나 뒤로 다른 인물들이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용추는 그런 기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상만천은 용추가 너무 성급히 움직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함곡의 의도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변명할 기회는 주고 치죄를 해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상만천은 웃음을 띠우며 용추에게 상의하듯 말했다. 용추가 내린 명령을 자신이 거두어들인 일에 용추가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함곡은...”

“알고 있네. 어찌 내가 자네의 뜻을 모르겠나? 하지만 이제 저들이 도망갈 구멍은 없네.”

용추는 상만천이 너무 자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상대는 함곡이다. 상만천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함곡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허나 용추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반박하는 모습은 보기 흉하다.

“이 모든 계획이 함곡, 자네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인가?”

상만천이 시선을 돌려 함곡을 바라보며 물었다.

“계획이라니? 무슨 계획을 말함이오?”

함곡은 용추를 대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만천에게도 여전히 느물거리고 있었다. 상만천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심사가 약간 뒤틀린 것 같았다.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으면 떳떳하게 밝히는 것이 천하의 함곡답지 않을까?”

느물거리는 함곡의 태도에 상만천 역시 상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요량으로 추궁하듯 말을 뱉었다.

“떳떳이라... 좋은 말씀이오.”

함곡이 나직하게 뇌까리면서 말을 끝낼 즈음에는 지금까지의 느물거리는 기색을 지우고 표정을 굳혔다. 

“떳떳하게 속내를 밝힐 사람은 정작 상대인과 추태감이 아니오? 회라는 이기적인 집단을 장악해 감히 언감생심 황위(皇位)를 노리는 역모(逆謀)를 꾀하고 있다고 한번쯤 밝혀주시는 것이 어떻소?”

함곡은 어느덧 위엄을 갖추고 추상같은 어조로 나무랐다. 상만천과 추산관 태감의 얼굴에 웃음기가 지워지면 잠시 당혹스런 표정이 나타났다.

“더구나 상대인께서는 회를 장악하기 위해 사위이자 그 분의 제자인 윤석진을 시켜 회주 중 한 분이신 철담어른을 살해하는 패륜을 저지르도록 사주(使嗾)하지 않았소?”

상만천은 약간 얼굴이 붉어졌다가 날카로운 안광을 발했다. 그의 눈에 살기가 어른거렸다.

“역시 제갈량을 뺨치는 모사(謀士)라 하더니 세 치 혀끝만 닮은 것 같군.”

교묘하게 혀를 놀려 허튼 소리로 사람들을 현혹하지 말란 말이다.

“가슴이 찔리오? 하기야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고 죄 없는 혈간어른을 시해하도록 지시한 추태감께서도 역시 다를 바 없소이다만...”

그 말에 추태감이 황급히 호통을 쳤다.

“이놈! 보자보자 하니까 제 멋대로 지껄이는구나. 생사람을 역모죄로 누명 씌우는 것 역시 나라와 황상께 큰 짐을 지우는 죄임을 모른단 말이냐!”
 
“하하하”

추태감의 호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함곡이 입을 크게 벌리며 웃어젖혔다. 한동안 웃음을 그치지 않다가 다시 표정을 굳히며 냉소를 쳤다.

“그동안 동림당원의 입을 막기 위해...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함곡이 갑자기 말을 하다말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의 고막을 파고드는 풍철한의 전음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다음 주는 추석연휴로 인하여 연재를 쉬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라며 10월 1일 다시 뵙겠습니다. 모두 풍성한 추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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