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한국인 아빠,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사연] 아들 키우며 사업 성공한 인니 엄마 "아이 꼭 만나주길"

등록|2007.09.21 17:15 수정|2007.09.23 10:59

▲ 멋지게 생긴 인도네시아 중학생 오대한군과 어머니 하나씨. 하나씨는 아빠를 찾는 아들의 바람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 조호진

"아빠에 대한 미움이나 서운함 그런 것은 없어요. 지금 못 만나면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아서, 꼭 한번이라도 만나보고 싶어서 한국에 왔어요."

태어난 지 열이틀 만에 엄마 품에 안겨 한국을 떠나야했던 핏덩이가 열두살짜리 중학생으로 훌쩍 커서 입국했다. 아빠를 찾기 위해 한국에 온 인도네시아 소년은 자신과 어머니를 외면했을 뿐 아니라 양육비 지급 약속마저 어긴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 "꼭 한번 만나고 싶다"며 그리움을 나타냈다.

오대한(12·인도네시아 멜라니아중학교 1학년)군은 엄마 하나 리아나와띠(48)씨와 함께 아빠 오아무개(52)씨를 찾기 위해 지난 8일 한국에 왔다. 하나씨는 12년 전 한국을 떠나면서 간직했던 주소를 가지고 수소문했지만 거주했던 아파트는 재개발돼 흔적도 없고, 경찰에 신원조회를 부탁해 알아보려했지만 개인신상 정보여서 협조 받을 수 없었다.

한국 남자 떠난 뒤 사흘 만에 임신 사실 알아

▲ 핏덩이로 떠났던 '오대한' 군이 의젓하고 멋진 모습의 중학생으로 한국에 입국, 아빠 만나기를 원하고 있다. ⓒ 조호진

하나씨는 오씨를 지난 92년 처음 만났다고 했다. 당시 호프집 종업원이었던 그녀는 한국의 D건설사 직원으로, 자카르타에 파견된 오씨를 미혼자로 알고 사랑을 나누었다는데 거짓이었다. 1년 동안의 연애 끝에 2년간 동거하던 오씨가 94년 4월 10일 인도네시아를 떠나면서 기혼자임을 고백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떠난 지 사흘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돌아온 응답은 유산시키라는 냉랭한 말뿐. 첫 번째 아이를 유산시킨 바 있었던 그녀는 그해 8월 29일 서울의 오씨 집에 찾아가 일주일 가량 머물면서 아이만 낳게 해달라고 호소했다고 했다.

오씨와 그의 아내는 임신 8개월의 그녀에게 출산비용 20만원과 비행기 티켓, 여자용 유아복을 안겨 인도네시아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두 달 뒤인 11월 16일 다시 한국에 왔다. 당시 서른다섯의 고령 임산부였기에 남편의 서명 없이는 위험부담이 큰 수술을 할 수 없다며 병원 측이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18일 뒤인 94년 12월 3일 서울 강서구 Y산부인과병원에서 3.3㎏의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몸을 회복하지도 못한 그녀는 출산 열 사흘만인 12월 15일 아들과 함께 한국을 떠나야 했다. 한국인 아빠가 준 것은 '오대한'이라는 이름 석자였다. 미혼모가 되어 떠났던 그녀는 다음 해인 95년 9월 11일 한국에 입국했다. "돈도 없는 여자의 혼자 몸으로 아이를 키우기가 너무 힘들어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오씨와 그의 아내는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2007년까지 12년 동안 6개월에 한 번 600불씩의 양육비를 송금키로 약속했다. 그녀가 다시 한국에 올 경우 양육비 지급을 중단하고 또 어떠한 경우에도 오씨의 회사나 가정을 찾아와서 안 되며, 대사관에서는 새 거주지나 전화번호를 일체 알려주지 않는다는 단서조항을 달아 공증까지 했다. 그녀는 일주일 뒤인 17일 약속을 철썩 같이 믿고 또 다시 출국했다.

4년 만에 끊긴 양육비... 성공한 미용실 사장으로 나타난 그녀

지켜지지 않은 약속 증서...12년 동안 송금하기로 한 양육비가 4년만에 끊겼다는 하나씨. 공증한 약속 증서와 아들의 출생증명서, 아이 아빠의 여권 사본 등은 세월 만큼이나 흐릿했다. ⓒ 조호진

그러나 양육비 지급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6개월에 한 번씩 오던 양육비 600불은 4년 만에 끊겼고 연락은 두절됐다. 아들과 함께 하숙집 생활을 하던 그녀는 돈이 떨어져 여러 번 쫓겨나야 했고, 98년 자카르타 폭동 당시에는 돈이 없어 아들과 함께 나흘 동안 굶기도 했다고 밝혔다.

아들 대한이가 두 살 무렵이던 어느 날 끓는 물로 인해 팔에 큰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아들을 병원에 데리고 다니다 병원비에 쪼들리면서 더욱 서럽고 힘겨워서 많이 울기도 했다. 그렇게 힘겹게 키운 아들은 의젓하게 자랐고,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문제 외에는 나무랄 데가 없다고 했다.

증권회사 직원생활과 화장품 외판원, 가라오케 종업원 등을 통해 돈을 모은 그녀는 지난 2004년 11월 은행 융자를 받아 미장원을 열었다. 오전 11시부터 새벽 2시 30분까지 일하는 그녀. 아들의 학교조차 찾아갈 틈도 없이, 아들과 함께 지낼 여유도 없이 열심히 경영한 결과 자카르타 중심부에 8명의 종업원을 둔 '대한 뷰티살롱(DAYHAN BEAUTY SALON)' 여사장이 되었다.

양육비가 끊겼음에도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았던 그녀는 왜 갑자기 한국에 찾아왔을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빠 존재에 대해 묻기 시작하던 아들이 최근 들어 아빠를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켜지지 않은 공증이지만, 12년 양육비를 지급하기로 한 시한(時限)이 올해 9월 15일이기 때문에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아 서둘러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피해주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아이 꼭 만나주길"

▲ 난생 처음 아빠의 조국 '대한민국'을 방문한 대한이. 아빠의 조국은 인도네시아 소년의 애타는 그리움을 해결해 줄 것인가? ⓒ 조호진

자신을 버리고, 아들을 외면한 오씨에 대한 사랑도 미움도 오래 전에 접었다는 하나씨. 왜 재혼하지 않았냐고 묻자 "삶이 힘겨워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무엇보다는 아들을 잘 키우고 싶었다"며 "남자들의 유혹이 제법 있었지만 나에겐 아들과 사업만이 중요했다, 이 사업을 더욱 성공시켜 아들에게 물려줄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이 아빠에게도 소중한 가정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피해나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며 "나는 만나지 않아도 좋지만 아이에게는 아빠를 꼭 만나게 해주고 싶다, 찾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고 기다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생부와 이복형제를 빼닮았다는 대한이. "학교 친구들 엄마, 아빠가 학교에 왔지만 나에겐 아빠가 없었고 엄마는 사업이 바빠서 오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고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며 "친구들이 '대한'이란 이름은 한국이란 나라 이름 때문에 알겠는데, '오'는 무슨 뜻이냐고 자꾸 묻는다, 엄마가 게임을 못하게 할 때는 조금 귀찮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들 모자는 현재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하티엘록 교회'에 머물고 있다. 한광숙(선교사·32)씨는 "의젓하고 멋진 대한이를 처음 만나면서 가슴이 뭉클하고 마음이 아팠다"면서 "아빠가 아이를 꼭 만나주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만나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