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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혁명의 봇물이 터지다

[동학기행③] 만석보 터와 고부관아 터

등록|2007.09.23 16:21 수정|2007.09.25 19:40

▲ 만석보로 가는 둑길. ⓒ 안병기

고부봉기의 발화점이 된 만석보
주산마을에서 나와 710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간다. 만석보를 향해 가는 길이다. 비가 많이 내린다는 이유로 다음 기회로 미루며 말목장터를 그냥 지나친다. 이윽고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읍천과 동진강의 물결들. 거센 황토물이 굽이치며 격류를 만들어내고 있다.  왼쪽으로 난 둑길을 따라간다. 길가에는 비를 맞은 해바라기들이 후줄근한 모습으로 서 있다. 둑과 강가에 빼곡하게 심어진 코스모스들이 비바람에 이리저리 하늘거린다. 햇볕이 쨍쨍한 날보다 비 내리는 날의 모습이 오히려 청초하다. 코스모스엔 약이 되는 날이 해바라기에는 독이 되는 날이이다. 식물들도 날씨 하나에 이렇게 삶의 새옹지마가 교차되니 세상이란 얼마나 변화무쌍한 것인가.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만석보유지비가 나와 길손을 맞는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부당하고 과도한 수세 징수로 동학혁명의 직접적인 빌미를 제공했던 만석보가 있던 자리라는 뜻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만석보유지비  

▲ 만석보 조감도. 옛 보와 새로 만든 만석보 사이에 만석보유지비가 어정쩡하게 들어 서 있다. ⓒ 안병기

▲ 동진천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에 만들어진 만석보. ⓒ 안병기

▲ 1973년에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만석보유지비. ⓒ 안병기

보(洑)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려고 쌓은 둑이다. 하천을 가로질러 나무와 돌로 막았는데 이를 '보'라고 한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 앞 냇가에 보를 쌓는 것을 본 적 있는데 돌로 쌓고 나서 군데군데 나무 말뚝을 박아 지지해 주는 식이었다.   만석보 이전에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는 농민들이 쌓은 광산보라는 보가 이미 있었다(조감도 우측). 그러나 어떻게 하면 농민들을 수탈할까 궁리하던 조병갑은 고종 30년(1893)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운 보를 쌓았다. 남의 산에서 산 주인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수백 년 묵은 소나무를 베어다 쓰기까지 하면서.  보를 쌓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보의 높이이다. 너무 낮으면 저수량이 적고,  반대로 너무 높이 쌓으면 홍수가 날 때 상류 쪽에 있는 낮은 논들이 침수되기 때문이다. 만석보는 너무 높이 쌓아서 홍수가 지면 상류의 논들로 물이 흘러들어 피해를 줬다.  게다가 보를 쌓은 첫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마저 어겼다. 한 마지기 당 물대기 좋은 논에서는 두 말, 좋지 않은 논에서는 한 말의 수세를 받는 바람에 고부 관아의 창고가 넘쳐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예동, 두전, 백산 등에 700여석을 쌓아둘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삼남지방에는 가뭄이 계속되어 쌀의 소출이 크게 줄어들었던 모양이다. 수세를 탕감해 달라고 사정하러 관가로 찾아갔던 농민들은 감면은커녕 매만 맞고 나오기 일쑤였다. 마침내 학정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1894년 1월 11일에 고부 관아를 점령해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만석보로 달려가서 원한 맺힌 보를 헐어버렸다.  이제 와서 그 흙탕물
어찌 두고 보랴.
원한 쌓인 만석보 삽으로 찍으며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소리소리쳤다.
만석보를 허물어라.
만석보를 허물어라.
터진 봇둑 밀치며 핏물이 흐르고.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얼싸안고 울었다.
 -양성우 시 '만석보' 일부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이었다. 지금도 물이 빠졌을 때 하천 아래를 주의하여 살피면 말뚝이 보인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만석보는 그렇게 농민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옛날 만석보가 있던 자리로 가는 중간에는 만석보유지비가 서 있다.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보다 국도변에 가까운 곳이다. 실제 만석보가 있었던 장소로 가려면 비가 있는 곳에서 300여m가량 둑길을 더 가야 한다.  당시 동학혁명기념사업회 임원이신 최현식 선생(현 정읍문화원장)께서 위치에 대한 고증까지 해주었지만 헛일이었다. 윗 분들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야 한다는 당시 담당 공무원들의 '해바라기 근성'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둑길 초입에 해바라기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실소케 한다.
 

▲ 전북지사가 세운 만석보 정화기념비(1987). ⓒ 안병기

▲ 양성우의 '만석보' 시비(1999). ⓒ 안병기

  1987년, 전라북도 지사가 세웠다는 '만석보유지정화기념비'도 웃음거리 가운데 하나다. 독재정권에 빌붙어 민주주의를 오염시킨 사람이 앞장서 ‘정화’를 외친다는 것은 난센스다. 대관절 이곳에 정화할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혹 그가 정화하고 싶었던 것은 민주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불온한 공기였던가.  이곳에 세워진 양성우 시인의 시 '만석보' 시비에도 곡절이 있다. 시비를 세운 사람은 1999년 당시 이평면 면장이라고 하는데 그는 만석보유지정화기념비 대신 시비를 대신 세우려고 도에 철거신청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임 도지사가 해 놓은 걸 후임자가 없애면 나쁜 전례가 된다"라며 도지사가 서류를 반려하는 통에 그대로 두게 되었으며 제작 작업을 마친 상태였던 시비도 가져다 세울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 도지사는 자신이 후세들에게 얼마나 나쁜 선례를 남겼는지 알기나 할까. 둑 좌우로 펼쳐진 너른 들판을 바라보니 군데군데 벼들이 쓰러져 있다. 지금은 햇볕이 쨍쨍나서 나락 모가지가 차야 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햇볕은커녕 거의 매일 이다시피 비가 내리니 비를 바라보는 농민들의 시름이 얼마나 깊을 것인가.  너무 높이 쌓아서 홍수가 나면 상류의 논들로 물이 흘러들어 피해를 줬다는 만석보. 그 만석보가 허물어지지 않고 지금껏 그대로 남아 있다면 고부 농민들은 더욱더 애가 탔으리라.  한마디로 말한다면 만석보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 낳은 비극이다. 지나친 것보다는 모자라는 것이 낫다. 앞으로 다가올 우리 역사에서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사라지길 빈다. 바라노니, 새만금 역시 과유불급이 아니기를.  농민봉기의 현장 고부의 동학 유적들                      

▲ 면사무소 입구에 있는 군자정. ⓒ 안병기

 고부면 소재지에 도착하자,  먼저 고부면 면사무소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군자정을 찾아간다. 옛 동헌에서 바라볼 때 남쪽이다. 정자는 연못 한가운데에 앉아 홀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  4면이 연꽃으로 둘러싸여 있어 옛 지도엔 연정이라 표기된 정자다. 언제부터 이름이 바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군자정이라 부른 것은 아마도 '연화지군자자야(蓮花之君子者也)'라는 말에서 비롯한 것인가 보다.  이곳은 갑오년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 등이 억압과 착취로 빼앗은 농민들의 혈세로 풍류와 사치를 즐기던 현장 가운데 하나이다. 양성우의 시에 나오는 '만석보'의 "분바른 계집들 후들후들 떨" 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헌종 14년(1673)에 이후선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수리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허무맹랑하다. 조선 중기 이후 고부에 인재가 나지 않아 과거에 급제한 사람도 없고, 군수들이 온 지 1년도 안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는데, 이 모두가 연정이 황폐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이 떠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연못을 수리했는데 희한하게도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그 후로는 인재가 나왔다고 한다. 이것이 이곳에 전해오는 설화라는데….글쎄,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군수가 향락의 장소인 연못을 수리하려다 보니 백성의 눈치가 보여서 의도적으로 퍼트린 이야기가 아닐는지.

동학교도는 적고 원민이 많았다

▲ 학교 앞 언덕에 있는 고부관아 배치도. ⓒ 안병기

▲ 관아터에 들어선 고부초등학교. ⓒ 안병기

▲ 학교 담장에 이웃한 향교. ⓒ 안병기

 오늘날 고부는 정읍시에 딸린 작은 면에 지나지 않지만 고부 봉기 당시엔 전주 다음으로 큰 고을이었다. 정읍보다 큰 고을이었다는 얘기다. 고부는 인근 농지에서 나오는 쌀이 죄다 몰려드는 쌀의 집산지였다. 쌀을 사려고 전국 각지에서 상인들이 몰려들다 보니 상업도 덩달아 번성할 수밖에.  여러 가지 물산이 풍부한 데다 부안 땅을 관할하고 있어 해산물까지 풍부한 까닭에 부패한 관리들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중앙의 관리들은 윗선의 연줄을 동원하고 뒷돈을 대기도 하면서 고부 군수로 부임하지 못해 안달했다. 얼마나 매력적인 수탈의 고장이었으면 1893년 11월 30일에 익산 군수로 발령났던 조병갑이 새 임지인 익산으로 가지 않고 뭉개면서 뒷손을 써 떠난 지 채 달포도 지나지 않아 이곳으로 되돌아왔겠는가.    고부 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은 조병갑이 다시 돌아온 다음 날이자 주산마을에서 사발통문이 작성된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인 1894년 1월 10일이다. 야음을 틈타 농기구와 죽창을 손에 들고 말목장터에 모인 농민들은 1월 11일 새벽 고부 관아를 점령한다.   "고부에서 난을 일으킬 때 동학이 많았느냐, 원민(寃民)이 많았느냐?"라고 묻자 "의거할 때에 원민과 동학이 합하였으나 동학은 적고 원민은 많았다"라고 심문 기록인 '전봉준 공초'는 전하고 있다.  앉은뱅이 이빨 물고 치는 북소리,
고부산천 회오리치며 크게 울렸나니,
여우 같은 조병갑이 옷 바꿔 입고
어디론가 흔적 없이 뺑소니치고,
분바른 계집들 후들후들 떨며
목숨을 빌었다.
맨땅에 엎드려.
 -양성우 시 '만석보' 일부  그날을 마치 현장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생생한 시 구절이다. 군수도 도망가버린 그 해방구에서 농민들이 맛본 환희는 얼마마 컸을까. 모르긴 해도 우리가 1987년 6월 항쟁의 거리에서 느꼈던 해방감보다 훨씬 크지 않았을까.  
갑오농민혁명 일지(음력)

 1892. 10.             동학교도의 공주 신원운동
         11.  1.        삼례  신원운동
 1893. 2.   9.         광화문 복합 상소
         2.  14.        서울 괘서 사건
         3.  10         동학교도의보은 집회
         3.    4         금구 원평 집회
         4.    2.        보은 집회 해산
        11.  15.        조병갑에게 수세 감면 요구
       11.   30         조병갑 익산 군수로 발령
 1894. 1.    9.        조병갑 익산 군수로 다시 부임
         1.   10.        밤을 틈타 말목장터에 모임
         1.   11.       고부 농민봉기 고부 관아 점령
고부 관아가 있던 자리엔 지금은 고부초등학교가 들어 서 있다. 농민들의 봉기가 있었던 숨가뿐 역사의 현장이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철저히 파괴돼 버린 것이다. 학교 담장 옆엔 고부 향교가 있다. 원래는 읍성의 서쪽 산기슭에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597년에 현재의 자리에다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그날의 현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거의 유일한 건물이다. 그러니 향교여, 부디 입을 열어 그날 네가 보았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는가. 그러나 향교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고 내리는 비가 대신 대답한다. 기록하지도 않고, 소중히 간직할 줄 모르는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덧붙이는 글 만석보가 있던 전북 정읍에는 지난 9월 16일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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