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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이별을 만끽할 시간을 허(許)하라

[시 더듬더듬읽기 56]김용택의 시 '섬진강 17-동구'

등록|2007.09.24 16:09 수정|2007.09.25 11:59
자고로 한가위는 삼국시대 이래 명실상부한 우리 민족 최고의 명절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이 돌아오고 사람들은 만사를 젖혀두고 고향집을 향해 "앞으로 갓!" 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기다리는 정든 고향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고생길이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은 귀성전쟁이라는 철벽같은 관문이다.

길을 나서자마자 도무지 끝이 만져지지 않는 막막한 정체와 참을 수 없는 '느림'이 주는 지겨움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보기에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아오던 사람들이 이 정체현상과 '느림'을 불가항력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느긋하게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 동안의 즐거움을 위해 그토록 많은 걸 희생한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귀성 수단 역시 세월 따라 변천을 거듭해 왔다. 예전에는 고속버스와 기차가 귀성 수단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이 땅에 자가용족이 출현하면서 귀성 풍속도 또한 경천동지할 만큼 달라졌다.

예전엔 각종 선물 꾸러미를 손에 들고, 머리에 이고 오는 아들 딸의 무거운 짐보따리를 들어 주려고 어머니들이 손수 동구 밖까지 마중나왔다. 추석을 쇠고 상경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의 짐보따리를 들어주면서 동구 밖까지 배웅을 나가곤 했다. 그리곤 자식을 실은 버스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바라보시는 것이다.

어쩌다 그런 풍경에 마주칠 때마다 마치 나의 어머니라도 되는 듯이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들은 모두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돼 버렸다.

어느 때는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 아쉬운 정을 떼지 못하고 서로 이별을 아끼는 그런 풍경이 사뭇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게 바로 사람살이의 오묘한 맛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난 그때마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LP 한 장을 꺼내 턴 테이블에다 건다. 

정세현이 부르는 '섬진강'이라는 노래다. 아니, 이제는 범능 스님이라고 불러야 옳으리라. 입산하기 전, 그는 1980년대, 광주를 대표하는 뛰어난 민중가요 가수 중 하나였다. 그는 전남대의 유명한 노래패 <친구>를 만들기도 했다. 크고 작은 시위 때마다 빼놓지 않고 부르던 '광주 출전가'도 그가 작곡한 것이다.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 / 무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 무엇이 두려우냐 출전하여라 / 억눌린 민중의 해방을 위해 /나가 나아가 도청을 향해/ 출전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광주 출전가'

이 노래 가사는 꽤나 전투적인 편이지만 그가 부르는 민중가요들은 비교적 서정성이 짙었다. 게다가 민중가요로서는 드물게 국악적인 요소가 가미돼 있어 이채롭기까지 했다.

▲ 정세현 1집 앨범 자켓. ⓒ 안병기


그는 1991년 지구 레코드사에서 <통일은 언제일까>라는 LP 음반을 내며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통일은 언제일까'라는 노래를 타이틀 곡으로 내건 이 음반에는 지금은 작고한 무형문화재 제51호 남도 들노래 보유자였던  조공례씨에게 사사했던 남도 소리의 창법이 흠뻑 녹아 있다. '통일은 언제일까' 라는 노래도 절창이지만 그 뒤를 잇는 '섬진강'이란 노래도 그에 못지않은 절창이라 할 수 있다.

가네 가네 떠나가네 찔레꽃 핀 강길 따라 가네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새벽강물 부르고

덤불같은 우리어메 손짓에 눈물이 앞을 가려
풀꽃 흐려지는 서러운 길 서울길 가네
어메어메 나는 가네 우리 아베 들길에 두고
만나고 헤어지는 구비구비 섬진강 물결 따라 서울길 가네.-정세현 곡 '섬진강'


서울 가는 자식의 호주머니에 몇 푼 안 되는 노잣돈을 찔러주면서 자식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들길에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메. 어메의 손짓에 자식은 눈물이 앞을 가려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한다. 아마 "뒤돌아 보지 말고 어서 핑 가라 "라고 손짓하는 어메의 눈가에도 방울방울 이슬이 맺했으리라.

4년쯤 전이었던가.  난 범능 스님과 1시간가량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오랜 수소문 끝에 그가 대전 시내 대진정사라는 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미리 전화를 하고 약속 시간을 정하고 나서 찾아갔다. 그를 만나러 갈 때 1집 음반을 가져갔다. 나를 만나자마자, 그는 대뜸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부터 물어 왔다. 그러더니 그 앨범을 쳐다보며 "아니, 나는 다 없애버린 판을 가지고 계시다니, 참!" 하고 감탄했다.

우린 전남대 다니던 시절, 그가 만들고 활동했던 노래패 '친구'에 대한 이야기, 입산 동기, 그의 음악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이야기 속에서 내가 가장 감명받았던 이야기는 그의 5형제 가운데 4형제가 출가를 했다는 얘기였다. 그토록 지독한 불연(佛緣)이 또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스님이 된 후 처음으로 낸 음반인 <먼 산>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본래 수도승들이 지켜야 할 계율인 사미계를 보면 노래하고 춤추지 말며 풍물채비도 하지 말고 찾아가서 듣지도 말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요즘엔 세월이 변해서인지 그 말고도 도신 스님, 심진 스님 등 여럿 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대중의 곁으로 돌아온 이유를 물었더니, "불교적 입장에서 대중에게 더불어 사는 삶의 내용을 얘기하고 싶었다. "라고 얘기한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불효자식 올림'

▲ 시집 표지. ⓒ 창작과비평사

정세현 곡 '섬진강'은 김용택 시인의 첫 시집 <섬진강>에 들어있는 '섬진강 17-동구'라는 시에 바탕을 두고 작사한 것이다. 2쪽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긴 원시를 노래 부르기 좋게 크게 줄였다.

추석에 내려왔다
추수 끝내고 서울 가는 아우야
동구 단풍 물든 정자나무 아래
-차비나 혀라
-있어요 어머니
철 지난 옷 속에서
꼬깃꼬깃 몇 푼 쥐여주는
소나무 껍질 같은 어머니 손길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고개 숙여 텅빈 들길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우야
서울길 삼등열차
동구 정자나무잎 바람에 날리는
쓸쓸한 고향 마을
어머니 모습 스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어머니 어머니 부를 아우야
찬 서리 내린 겨울 아침
손에 쩍쩍 달라붙는 철근을 일으키며
공사판 모닥불 가에 몸 돌리며 앉아 불을 쬐니
팔리지 않고 서 있던 앞산 붉은 감들이
눈에 선하다고
불길 속에 선하다고
고향 마을 떠나올 때
어여 가 어여 가 어머니 손길이랑
눈에 선하다고
강 건너 콩동이랑
들판 나락 가마니랑
누가 다 져날랐는지요 아버님
불효자식 올림이라고
불효자식 올림이라고
너는 편지를 쓸 것이다.-김용택 시 '섬진강 17  -동구' 전문


시집 <섬진강> 속에는 샘물 같은 맑은 언어가 있다. 그래서 시 한 편, 한 편이 서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메마른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시집을 읽는 동안, 우리는 해체되어가는 오늘의 농촌공동체의 모습을 확인하며 이름 지을 수 없는 통증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잃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기도 한다.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시집 <섬진강>이 출간된 1985년은 가히 '섬진강의 해'라 해도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시 '섬진강 17  -동구' 속에 나오는 아우가 그의 진짜 피붙이인지 아니면 동네 아우인지, 그냥 시를 쓰려고 등장시킨 가공의 인물인지 난 알지 못한다. 아무튼  '아우'라는 사람은 서울에서 철근장이 일을 하나 보다. 일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농사지으시는 어머니, 어버지가 추수하며 고생하실 일을 생각에 차마 떨치고 가지 못한 것일까. 하여간 그의 아우는 추석 쇠고 곧장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 추수를 끝내고 난 뒤에야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아우에 대한 안쓰러움이 시의 곳곳에 절절이 묻어 있다.

어머니에게 이별을 만끽할 시간을 허(許)하라

요즘 자식과 부모 간의 이별에도 망설임이 없다. 그야말로 깜짝 사이에 이루어진다. 집 앞에 주차해둔 차에 오르는 순간, 이별은 급격한 속도로 완성을 향해 질주하고 만다. 서운해서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도 없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는 어머니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돼버렸다. 도무지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익어갈 틈이 없다. 눈물샘에 채 눈물이 차오르기도 전에 이별이 닥쳐오니 그럴 수밖에.

"꼬깃꼬깃 몇 푼 쥐여주는/ 소나무 껍질 같은 어머니 손길"을 느낄 수도 없다. 그런 풍경도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다. 예전엔 친척이 왔다 가드라도 반드시 차비를 줬다. 상대가 거부하더라도 한사코 호주머니에다 차비를 찔러주었던 걸 상기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낄 지경이다.

시인들이 쓴 글에도 손님에게 차비를 주던 전통이 사라진데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시인들도 적지 않다.

투구게가 차에서 내리는데, 그는 "잠깐만" 하면서 투구게를 멈추게 했다.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미는데 그는 지갑을 꺼내고 거기에서 만원짜리 두 장을 빼, 투구게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차비 있어요"하고 투구게가 주춤하는데 임동확씨가 "이 지방 풍습이오"한다(아, 이건 사라진 미풍양속인줄 알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늦은 밤, 술자리 같은 데서 헤어질 때 '너 차비 있냐?'고 절대 묻지를 않고 있다).-<내가 만난 시와 시인> 45쪽, 이문재

여기서 투구게는 이문재 시인을 지칭하는 말이며 '그'는 황지우 시인을 가리킨다. 사라진 미풍양속이 복원되는데 대한 무척이나 감격스러운 모양이다.

추석을 쇠고 집을 떠나올 적에, 어머니에게 이별을 만끽할 시간을 주는 자식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식이 아무리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지라도 기필코 호주머니에다 꼬깃꼬깃한 돈을 찔러주는 어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설움이 존재의 든든함을 느끼게 해주는 기쁨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린 너무 오래 잊고 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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