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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보름달처럼 환한 동행

사회복지사 꿈꾸는 유정이와 안나 할머니의 만남

등록|2007.09.26 13:33 수정|2007.10.01 15:14

그리움한가위 보름달 ⓒ 최종수


그리움도 차오르면 보름달처럼 환할 수 있을까.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보름달만 같은 그 달이 두둥실 환하다. 추석날 저녁식사를 하고 물 한 잔 들고 베란다의 꽃들을 보았다. 빨랫줄에 걸린 방울토마토 넝쿨 사이로 보름달이 밝다. 차오른 그리움 하나가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어둠의 벗이 되어주는 한가위 보름달, 그 달빛에 구름 가듯이 골목길을 걷는다.

달빛 따라 걷는 길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들. 오전 10시에 드린 한가위 합동위령미사, 6남 2녀 중 4형제가 사는 서울에 갈까.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거북이걸음 귀성길일지라도 꾸역꾸역 몸을 실었을 텐데. 아버진 33년 전, 어머닌 24년 전 꽃상여 타고 가셨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쉽사리 서울로 떠나지 못한 마음은 홀로이 책을 읽었다.

과일꽃지난 해 여든 아홉 생일잔치 때 만든 꽃과일 접시 ⓒ 최종수


가로등처럼 내 삶을 밝혀준 추억들. 피붙이 하나 없이 남편마저 저승으로 보낸 안나 할머니, 여든 아홉 생일잔치 기억이 보름달처럼 두둥실 떠오른다. 그 추억을 깨우듯 반가운 얼굴이 손잡고 걸어오고 있다.

외식하고 돌아오는 아버지와 딸을 병문안 가는 길목에서 만났다. 나와 동행했던 보름달이 바통을 부녀에게 넘기고 그림자로 동행한다. 셋이서 도란도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초등학교 시절 밤길을 몰래 떠난, 엄마도 없이 400여일이 넘게 아버지와 번갈아 병간호를 했던, 정이 많아서 이름도 유정일까. 할머니가 좋아하는 드링크를 사들고 앞장 서는 아빠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연민친할머니처럼 손을 잡고 대상포진 상처를 보는 유정이 ⓒ 최종수


병실에 들어선 유정인 두 달 전 휠체어와 함께 강원도 삼촌 집으로 간 친할머니를 대하듯 할머니 손을 잡고 환하게 웃는다. 덩달아 두 볼에서 복사꽃을 피우는 안나 할머니, 아흔이지만 마음처럼 고운 살결에 대상포진 상처가 꽃처럼 환하게 피었다. 환하게 웃는 볼보다 상처가 더 붉다. 한가위 전날 밤 외로움의 상처가 따까리처럼 할머니 입에서 떨어졌다.
 

동행할머니와 환하게 웃는 미소 ⓒ 최종수


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대상포진 아픔보다 한가위 명절에 혼자라는 외로움이 더 아팠나 보다. 따까리가 떨어져 나간 자리마다 남아 있는 핏빛이 이럴까.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수의를 가져 와! 이렇게 환자복 입고 관으로 갈 순 없잖아?' '밥도 모래알 같다'며 어제 밤에 투정을 부렸어요."

동행아빠를 오빠냐고 묻는 할머니에게 아빠를 가르킨다 ⓒ 최종수


난 할머니 왼손을 유정이는 할머니 오른손을 잡고 오랜 시간 이야기꽃을 피웠다. 침묵이 흐를 땐 서로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한 시간이 쏜살처럼 훌쩍 흘렀다. 밤 10시 주무실 시간이다. 잡고 있던 채로 할머니를 부축하고 화장실로 갔다. 복도에는 휠체어가 유정이의 사회복지사 꿈처럼 앉아 있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동행을 축복하듯이 간호실 창문 사이로 보름달도 환하다.

동행화장실 용무를 보고 병실로 가는 할머니와 유정이 ⓒ 최종수


한가위 보름달처럼 눈부신 동행에 할머니는 배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간호사실 앞에서 간병인 손을 잡고 병실로 멀어지는 할머니, 우린 들판의 코스모스처럼 손을 흔들었다. 병원 현관문을 나서자, 어둠의 벗이 되어준 보름달빛이 더 환하다. 밤만큼 깊어진 사랑 탓일까. 셋이서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따라 흐르는, 여럿이 연민으로 피워낸 꽃길처럼 골목길도 환하다.
덧붙이는 글 대안언론 '참소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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