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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분꽃 보면 결핵으로 죽은 '분이'가 생각나

시집가서 소박 맞고 돌아온... 분이 생각

등록|2007.09.26 18:48 수정|2007.09.26 19:31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하지도 않고, 길쌈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한다.- <마태복음>에서

보라빛보다 아름다운 연보라빛 소묘이름도 없는 풀꽃처럼 살다간 분이 같은 분꽃 ⓒ 송유미


하얀 분가루가 쏟아지는분꽃으로 소꼽놀이 하던 아이들은 다 어디 갔을까 ⓒ 송유미


내 소꼽 친구 중에 '분이'란 아이가 두명이나 있었다. 분이란 아이 중 한 아이는 집에서 '꽃분이'로 불렸는데, 그 꽃분이와 종종 소꼽놀이를 했다. 당시 시골로 막 이사 온 나에게 유난히 다정하고 친절했던 꽃분이.

그 분이랑 함께 분꽃 귀걸이 만들어서 달고 분꽃으로 꽃목걸이도 만들었다. 분꽃의 까만 꽃씨에서 하얀 분가루가 나온다는 것도 그앨 통해 처음 알았는데, 분이는 그 가루로 화장을 곱게 하길 좋아했다. 그리고 둘이 하얀 분꽃 가루를 얼굴에 바르고 허름한 창고에서 종종 '콩쥐팥쥐' 연극을 하기도 했다.

분이는 새 엄마가 쓰다 버린 화장품으로 가득 채운 화장품 상자를 갖고 있었다. 그 상자 속에는 입술을 바르는 립스틱, 나비가 그려진 '코티' 분첩과 칠이 약간 벗겨진 손거울도 있어서, 서로의 머리를 빗겨주며 공주 머리를 따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실은 분이의 얼굴은 하얀 분칠을 하지 않아도 창백했던 것이다.

폐터에 만발한 분꽃분이처럼 정겨운 누이꽃 ⓒ 송유미


그때 소꼽 놀이를 하던 분이는 종종 입에서 피를 토하곤 했었는데, 나는 그애가 앓은 병이 가슴앓이란 것을 한참에야 알았다. 그후 그 고장을 뜬 후에 가끔 풍문으로 분이의 소식을 들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사랑이 없는 중매 결혼을 했으나, 한달도 채 안 되어 폐결핵이 재발했다.

결국 친정에 쫓겨와서 지내다가, 결국은 이혼을 당하고 새 엄마의 눈치를 받으며 마산 가포 요양원에서인가 요양 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후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진 그녀가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는 소식을 몇 해 전에야 접했던 것이다.

내게 분꽃은 언제나 분이 생각을 떠올리게 하고, 아득한 기억 저편에 소꼽놀이 친구들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꽃이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으면, 나는 그 꽃분이와 자주 놀아서인지 결핵을 심하게 앓아서, 학교에 오래 다니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화단에 분꽃을 많이 심어서 그 분꽃의 잎을 달여 주던 기억도 이제는 새삼스럽다.

내게 분꽃은 아픈 기억과 함께 아릿한 그리움 저편에 뭉클뭉클한 피를 쏟아내던 분이의 핼쑥해서 더욱 풀꽃처럼 청초했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실제 분꽃에서 나온 하얀 꽃가루는 기미, 주근깨, 여드름에 효능이 있고, 근엽 등은 여러가지 병을 다스리는 이뇨, 사열, 활혈, 산어, 뇨혼탁, 대하, 폐결핵의 객혈, 급성관절염, 부녀의 혈붕, 백대 등을 치료하는 민간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가을 분꽃의 꽃씨와 근엽 등은다양한 민간요법의 약재로 쓰인다 ⓒ 송유미


요즘 이름들은 대개 남녀 구별이 없는 추세이지만, 유년 시절에는 유난히 분자가 들어가는 소꼽 여자 친구 이름이 많았다. 분이, 분남 혹은 순분이 등 그 이름만 듣고도 성별을 알았는데, 요즘은 이름으로 성별을 알기는 힘들다.

고향집 초가집이나 빈 텃밭이나 장독대 곁에 흐드러지게 피어, 여아들에게 사랑받던 분꽃...그 많은 분꽃들은 다 어디 갔을까.

분꽃의 실제 원산지는 남아메리카이고 분꽃에 대해 떠도는 전설 또한 우리 것은 아니지만, 나의 깊은 의식 속에는 순수한 우리의 풀꽃처럼 여겨지진다. 왠지 시집가서 소박맞아 돌아온 분이의 영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분꽃의 색깔이 유난히 예쁜 자주빛을 토하는 계절이면 문득문득 녹슨 거울 앞에서 하얀 분가루를 바르고, 분이가 각색하고 연출한 '콩쥐 팥쥐' 연극놀이도 생각이 난다.

분이가 생각나는 분꽃여드름, 기미, 주근깨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 송유미


항상 분이는 나에게 콩쥐 역할만 하게 했지만, 실은 그 애가 착한 콩쥐 역을 했어야 정말 잘 어울렸을 텐데...하는 생각이 나는 그리운 분꽃....

분꽃은 해마다 가을이면 더욱 예쁘게 다시 피지만, 한번 간 분이는 언제 지구에 다시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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