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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은 중년의 사랑

등록|2007.09.29 19:01 수정|2007.09.29 19:06
추석명절을 서울에서 쇠고 시골집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연휴 다음날 그것도 '역귀향'이라 기차 안은 한가한 편이었다. 더구나 내가 앉은 좌석은 역방향이기 때문에 좌석 대부분이 헐렁하게 비어 있었다.

졸다 깨다, 신문도 보다 그것도 지루하면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할랑할랑 혼자만의 기차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정차한 어느 역에서 남녀 승객 두 사람이 하필 내 뒷자리에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전후좌우를 전세 낸 것도 아닌 주제에 뒷좌석 승객이 앉았다고 '하필'까지 들먹이다니 '싸가지'가 없다고?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뒷좌석 승객을 두고 말도 안 되는 심술을 부린 이유는 우선은 남자 손님에게 풍기는 지독한 담배 진 냄새 때문이었다. 얼마나 지독한 골초였는지 그 사람이 앉고부터 머리가 아플 정도로 냄새가 심했다.

그리고 조금 후부터 들려왔던 두 사람의 대화. 아주 단단한 귀마개를 하면 모를까 듣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들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좌우지간 듣다 듣다못해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도망치기 전까지 한 30여 분에 걸쳐 두 사람의 대화를 강제로 청취했는데, 어찌나 역겹든지 정말 재수 없는 날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처음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를 들을 때만 해도 아주 금슬 좋은 부부인 줄 알았다. 뒷자리라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건네는 말소리가 어찌나 정이 담뿍 담기고 은근하던지 '정말 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싶어 지독한 담배 진 냄새까지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자네, 호르몬 치료 효과가 조금 어떤가?"
"음∼ 몸 상태가 훨씬 나아지는구만. 머리도 덜 아프고 기분도 상쾌하고…."
"주무르는 것도 괜찮제? 그것이 시답잖아 보여도 삭신 쑤시는 데는 그만이란께. 아참, 자네 커피 마실랑가?"


음료수 판매원이 오기 무섭게 마누라 커피까지 대령하는 센스 하며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이좋게 늙어가는 부부를 보는 게 흐뭇해 내 기분까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스토리, 줄줄이 이어지는 시시콜콜한 가정사를 듣다 보니 이 남녀가 불륜관계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남들이 듣든 말든 조심성 하나 없이 까발리는 여자 목소리도 그랬지만 남자는 한 수 더 떴다. 이야기 도중에 받는 휴대폰 내용을 들어보니 부인한테 온 것 같았다. 조금 대꾸하다 갑자기 짜증을 내면서 하는 말.

"아, 지금 손님과 이야기하느라 바쁘단 말이야. 바쁘니까 전화하지 마. 뭐? 오늘 못 들어가. 하여튼 2∼3일 걸릴지도 모르니까 기다리지 마."

전화를 끊자마자 여자가 투덜댔다.

"아이 시끄러워. 전화기 꺼놓지 그래?"
"핸드폰 죽여 놓으면 또 뭔 일 있냐고 꼬치꼬치 묻고 지랄이니까 그렇지."


불륜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란 통념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란 걸 알았다.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잃을 것이 많거나 후유증이 만만찮거나 하는 사람들에게나 통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내놓고, 이렇게 당당하게 휘젓고 다니는 사람들. 어떻게 사는 부류인지 안 봐도 훤했다.

여자는 내 또래인 것 같았다. 딸 둘, 아들 하나 삼 남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자식들도 엄마 행실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지 둘째 딸이 묻더란다.

“작은딸이 나한테 묻드만. 어떤 남자냐구? 그래서 친구 사이라고 그랬어. 만나서 고스톱 치고, 찜질방, 노래방 같이 다니고 그런 사이라고. 그랬더니 엄마 인생은 실패한 거라네. 미친년. 뭐 그렇게 여러 남자들을 만났으면서도 제대로 된 사랑을 못 해본 것은 실패한 거라나.”
“다른 애들은 뭐라고 안 해?”


“왜 안 해. 대놓곤 안하지만 아들하고 큰딸은 고민하나 봐. 내가 방을 얻어 딴살림하는 줄 알고 말이야. 큰딸하고 아들은 소심하거든. 큰딸이 걱정을 하니까 아들이 그러더래. 엄마 나이가 있는데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냐고…. 어이구! 작은 년은 나보고 자그마니 하래. 며칠씩 안 들어오는 건 너무 하지 않냐고? 하하하.”

갈수록 가관이었다. 기혼 남녀의 불륜, 영화, 소설 그리고 안방극장을 점령하는 드라마 속의 단골메뉴다. 어찌 드라마 속뿐이랴. 내 친족을 비롯해 친구, 지인들까지 크고 작은 사고를 쳐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수신제가'를 잘못 해 패가망신하고 정국까지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는 변모라는 고위 관리를 비롯해 흔하디 흔한 게 불륜 스캔들이다. 그러나 여태껏 그 흔한 추문을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적나라하게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랑’처럼 마음대로 안 되는 건 없다지만,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은 없는 거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그러나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사치스러운 애정행각이거나 추레한 애정행각이거나 불륜으로 맺어진 사랑은 도저히 아름답게 봐줄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 친구가 안 보면 무진장 후회할 것처럼 '아름다운 영화'라고 강조하기에 모처럼 맘먹고 영화관에 갔던 적이 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영화였지 아마. 뻔한 내용의 사랑이야기였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주부의 일상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꿈같은 사랑. 단 며칠간의 불륜이 주 내용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없는 틈에 이루어진 불 같은 사랑. 그 여자는 죽을 때까지 그 사랑을 가슴에 담고 산다. 내용은 애잔하지만 주인공으로 나온 여자가 볼품없이 뚱뚱해서 '뚱띠' 아줌마한테도 저런 사랑이 찾아올 수 있구나, 신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지만 그때도 역시 나한테도 '저런 사랑이…' 하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하긴 중년의 사랑을 꿈 꿀만큼 나이가 많았던 때도 아니고, 남편 대신 다른 사랑을 꿈꿀 만큼 남편에게 싫증이 나지도 않았을 때이니 그냥 무덤덤한 기분으로 영화감상을 즐겼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종착역 안내방송이 나왔다. 남아있던 승객들이 모두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겨들 때 나도 일어나 자연스럽게 뒷자리의 그 남녀를 볼 수 있었다. 짧은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보기에도 '나이트'께나 다닐 화상으로 보이는 남자가 느끼한 표정으로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여자는 모양은 꽤 냈지만 내 또래 정도는 돼 보이는 얼굴이었다. 위아래 까만색으로 쪽 빼입어 나름대로 세련미는 있었지만 눈썹 문신에 짙은 화장, 아주 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뭐가 예쁘다고, 에스컬레이터에서까지 내 앞에서 알짱대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남녀와 헤어져 오는 내내 ‘아름답지 않은 중년의 사랑’에 대해 쓴 입맛을 다셨다.

사정이 어떻든, 무슨 곡절이 있든 이런 사랑은 정말 추해 보인다. 설령 그 사람들이 인생의 허망함에 마음을 잡지 못하는 내 연배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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