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감씨 같은, 벼락 감춘 금강의 노래
[서평] 정진규 시집 <껍질>
▲ 정진규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 <껍질> ⓒ 세계사
정진규 시인은 90년대 초반 ‘몸’의 중요성을 제기하고(<몸詩>), 생명의 우주율을 노래하면서(<알詩>) 우리 현대시가 가야할 길의 단서를 여는 길라잡이 역할을 줄곧 해 왔다. 그리고 삶의 통로(通路)를 시작(詩作)으로 헤쳐가면서 시와 삶의 현부(玄府)를 드나들고(<도둑이 다녀가셨다>), 사물과 우주의 본색(本色)을 붙들려 했고 또 시인 스스로 그렇게 놀려고 했다.(<본색>)
정진규의 13시집 <껍질>도 이른바 '몸詩' 와 '알詩'의 연장선 위에서 생명과 우주의 본색을 한결같이 탐색하고 있다. 이 세상 저 너머의 세계(죽음)로 시의 징검돌을 하나 둘 놓고 있는 것이 앞의 시집들과 다른 모습라면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큰 그늘 양산을 뜻하는 ‘음예’라는 말을 통해 “사는 일이란 실종의 연일”이라는 평범하지만 커다란 삶의 진리를 캐내고 있다. 그것은 “양은 개밥 그릇에 익사한 호박벌 한 마리”를 통해서다. 삶의 큰 그늘 속으로 우리의 하루하루는 실종되고 있다. 우리가 끝내 돌아가야 할 자리, 큰 그늘의 모습을 가슴으로 확인하는 듯하다. 슬프고 깊고 커다란 내용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작품이다.
또 이런 시도 있다.
'끼니가 간데없던 그 시절엔 흔한 일이었지 긁어낸다고 했지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내 태아들 생각에, 무슨 연고였을까 지난겨울 내내 시달리고 있었는데, 무슨 일 일어나지 싶었는데, 조짐이 수상했는데, 그날의 비린내도 연일 진동했는데 어김없었다 이번엔 그걸로 날 끌어내었다 그리로 날 바짝 당기었다 이런 일 너무 잦다 날 어디로 데려가곤 한다 갑갑해라, 그냥 문 열고 나서니 直方 거기에 이르렀다 그런 곳 거기 있었다 이른 봄날 시오 리 꽃터널길 아득히 지나지나 죽은 내 태아들 어느새 띠둘러 업은 내가 바삐바삐 거기 가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라 하였다 건너라! 극락교를 둘이나 지나 연꽃 바다를 건너 거기까지 갔다 먼저 당도해 있는 태아들이 극락전 가득했다 모두 영양이 좋았다 뿐이랴, 이런 일 너무 잦다 날 어디로 자꾸 데려다 놓곤 한다 건너라! 빚이 많다고 그것 보라고 날아가던 동박새 한 마리가 연방 꽁지를 달싹거렸다 서두를 때라고 '- <寶城 大原寺 갔다> 전문
나는 이 시를 몸과 살을 떨면서 읽고 또 읽었다. 가슴을 서늘하게 적셔놓는 시다. 전남 보성에 있는 사찰 대원사는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태아들을 모시고 있는 절이라 한다. 시적 화자가 젊은 시절 그냥 긁어낸,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태아(胎兒)들 생각에 지난겨울 내내 시달리다가 문 열고 나서 직방에 이른 곳이 바로 대원사(大原寺)다.
그가 그곳까지 가서 죽은 태아들을 띠둘러 업고 바삐바삐 걸어서 극락교를 지나 연꽃 바다에까지 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는 해원(解寃)을 이루었으리라. 생명을 죽인 잘못, 그 참회를 하는 일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소중하고 필요한 일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 “빚이 많다고 그것 보라고”와 “서두를 때라고” 라는 말씀이 죽비처럼, 천둥처럼 내게 달려오는 듯하다.
어느 글에서 김춘수 시인은 정지용의 산문시집 <백록담> 이후 우리나라 대표적 산문시집을 낸 이로 정진규를 들었다. 또 그는 정진규의 산문시를 두고 “외부 정경 묘사가 어느 사이 교묘하게 내면의 존재론적 어둠을 건드린다”고 평한 바 있다. 고만고만한 운문시보다 리듬감이 더 뛰어난 정진규의 산문시는 사물의 겉을 묘사하면서 보이지 않는 속과 그 본질을 묘파해 들어간다.
정진규의 새 시집 <껍질>은 모두 83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득한 봄날> <죽음을 경배하며> 이 두 편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산문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이후 수십 년째 산문시의 결을 다듬어 온 그는 이제 우리 시단의 산문시의 단연 독보적인 존재다. 말(언어)의 숨결을 틀어쥐고 사물들과 내통(內通)하면서 펼쳐가는 그의 운필(運筆)과 음악(音樂)은 그윽하고 깊다. 연기본성(緣起本性)의 생명율(生命律)을 내장하고 있음이다.
숙련된 언어의 대패질로 마름이 잘 된 정진규의 새 시집 <껍질>과 벌이는 연애질이 참 재미나고 의미가 있을 터이다. “땅을 여는 연장”인 ‘삽’이라는 소리 하나로 너(사랑)에게로,
내 삶의 본질로 육박해가는 아래의 시도 겁나게 좋다. 마름질이 잘 된 시다.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 <삽> 전문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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