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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받으면 무엇이 달라질까

빨리 안 자란다고 묘목을 들썩이면 묘목만 죽는다

등록|2007.10.06 15:00 수정|2007.10.06 15:08
한국인이 지닌 ‘특유의 올림픽 정신(?)’은 문화예술계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 ‘특유의 올림픽 정신’은 가치 판단 기준을 1,2,3등으로 삼는 것이다. 예컨대 해외에서 상을 받으면 한국인들은 1등만이 의미가 있고 2등 3등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1994년 어느 미술비평가와 가진 대담에서 백남준은 한국인의 이러한 태도를 비판한 적이 있다.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지다.

'예술에는 다름이 있을 뿐이지 1등과 2등 구분이 없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해외에서 내가 상을 받으면 1등으로 여긴다. 혹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 마치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처럼 응원을 한다. 하지만 당연히 해외 예술 활동은 국가 대항전이 아니다. 국가내지 민족과 예술은 별개다.'

다시 돌아온 노벨문학상의 계절

노벨 문학상의 계절이 왔다. 한국인 작가의 수상 여부가 또다시 흥청거리고 있다. 고은 시인에 대한 주목도 이와 관련된다. 흥청거림의 이유야 백번 이해하지만, 한국의 노벨문학상에 대한 국가적 흥분은 타당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일종의 노벨상 집착증이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의 세계적 권위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뒷면으로 노벨 문학상 선정이 객관적인가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었다. 수십 년간 서구 작가에 치중해온 것이 대체적이다. 그러한 비판을 많이 받다보니 비판을 면하기 위해 대륙별로 안배하는 경향도 보인다.

동아시아권에서는 94년 오에 겐자브로 이후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이번에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로 중국작가를 수상자로 결정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는 노벨문학상 선정이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정치, 외교적 역학 관계도 작용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간 많은 작가들이 작품성에 관계없이 배제되거나 뜻밖의 수혜를 입기도 했다.

서구 중심주의에 정치적인 안배는 노벨문학상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럼에도 마치 한국에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학적 역량이 떨어진다고 여긴다. 거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고 한국의 문학적 역량이 높아진다고 볼 수는 없다.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은 것은 수치가 아니다. 흰소리로 한국은 아직 서구적 가치관에 합치하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상'에 불과한 노벨문학상에 왜이리 집착하나

노벨문학상은 상에 불과하다. 상금이 엄청나게 많은 상일뿐이다. 상은 받을만한 작품이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시대적 진보성이나 새로운 창조성은 보여주지 못한다. 노벨문학상도 과거성의 작품에 대한 시상일 뿐이다. 전위적인 작가들에게는 시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비판정신이 첨예한 작가는 배제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런 탓인지 노벨문학상의 권위가 예전만 못하고 그 작품집도 판매율이 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거꾸로 한국인들의 노벨상에 대한 집착은 국가적 민족적으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노벨상을 받는다고 무엇이 좋아질까? 이렇게 말하면 무슨 소리냐,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릴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하지만 알릴 문학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오히려 초라한 모습을 더 보이지는 않을까. 사실 이미 많이 알려진 바에야 상을 받는다면 의미는 적겠다.

자연스럽게 작품성과 저변의 확대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상을 통해 일거에 알리려는 것은 결국 정치 외교적 배려에 기대려는 심리적 한계에 그칠 뿐이다. 이 또한 1등주의의 폐해일 뿐만 아니라 한탕주의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노벨상만 받으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분명 환상이다. 노벨문학상 집착은 일본은 두 차례나 받았는데 왜 우리는 받지 못하느냐는 경쟁과 패배의식이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중요한 건 상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

이번에도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면 많은 언론들은 수많은 질타를 내놓을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번역과 홍보, 그리고 행정체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할 것이다. 그 비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예술은 올림픽 경기도 아닐 뿐만 아니라 1등 여부로 가치를 부여할 문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이며, 그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있다. 서구에서 인정받아야만 문학성이 성립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일부에서는 대안으로 노벨상을 위해서는 보편성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상을 받기 위한 보편적 가치에 대한 탐구 강조도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상을 받기 위해서 작품을 쓰는 이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생각해볼 때 노벨상 집착증은 한국 작가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또한 김우창의 교수의 말대로 보편성이라는 것도 다시 살펴야 한다. 예컨대, 계급, 인종, 성, 종교, 빈곤, 환경 파괴 와 같이 노벨상에서 선호하는 보편적 가치는 모두 서구적 가치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문제를 탐구하다보면 그것이 보편적인 가치와 연결되는 것이지 보편성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노벨상 집착증은 이미 존재하는 외부적인 보편적 가치를 강요하고 있다. 상을 받기 위한 보편성보다 나름의 창조적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말쯤이다. ‘당장’ 결과가 아니라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다. 빨리 안 자란다고 묘목을 들썩이면 묘목만 죽는다.
덧붙이는 글 데일리안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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