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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책시렁에 숨은 책 (3)

〈국어 순화의 이론과 실제〉, 〈러시아ㆍ혁명의 기록〉, 〈제3의 여성〉

등록|2007.10.07 13:53 수정|2007.10.07 13:54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더 많이 묻게 되는 세월 때요 세월 먼지일 테지만, 이런 때와 먼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밝게 빛난다고 느껴지는 책 세 가지 이야기를 적어 봅니다.


겉그림좋은 책은 오랜 세월 때가 묻어도 빛이 난다고 느낍니다. ⓒ 일지사

7. 국어 순화의 이론과 실제


- 글 : 한국교열기자회
- 펴낸곳 : 일지사(1982.7.25.)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얄궂은 일이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끔찍한 일들마저도. 우리 나라를 찬찬히 살피면, 일제강점기 때 끔찍했던 일들이 해방 뒤에도 버젓이 되풀이되어 국가보안법과 사회안전법이 되살아났습니다.

친일부역자는 다시 공무원이 되었고 권력을 움켜쥐었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과 노태우 군사정권은 일제강점기 때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독재정권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이 몽둥이는 ‘민주화’되었다는 오늘날까지 마구잡이로 판칩니다. 그리하여 일본총독이나 군사독재자와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대통령 후보가 되어 판세를 올리려고 다툼질이고, 우리들은 도토리 키재기밖에 안 되는 대통령 후보들 놀음놀이에 휘둘리며, 기자들은 이런 놀음놀이만을 더 부풀리고 북돋웁니다.

 세종큰임금 때 훈민정음을 만들지 않았어도 우리 말과 문화는 있었습니다. 다만, 그때까지는, 또 그 뒤로도 오래도록 우리 말과 문화는 기득권을 꼭 쥐고 있던 지식계층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고 적바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늘 있었지만 역사책과 문화책에는 남아나지 않아서 마치 없었던 듯 여겨졌달까요. 뒤늦게, 한국말과 한국 문화를 깨달아 준 일본사람이, 입에서 입으로 대물림되어 온 입말(고장말)과 입이야기(구비문학)와 입노래(민요)를 받아적어서 책으로 묶어냈습니다.

이 모양을 본 뜻있는 한국 학자 몇몇이 일본 학자들 품새를 좇았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여태까지 이 나라 백성들 말과 이야기와 노래는 제대로 적바림되지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한두 번 고양이 눈곱만큼 묶였을 뿐.

 말이 말다운 대접을 못 받고, 이야기가 이야기답게 들리지 못하며, 노래가 노래답게 불리지 못하는 이 땅에서는, 문화가 문화답게 뿌리내리며 싹틀 수 없습니다. 신문에 적히는 글을 가다듬고 추스르는 교열기자가 있어도, 이들 교열기자는 거의 힘이 없다 보니, 정치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와 운동 이야기를 기사로 다루는 기자들 엉터리 글이 판을 칩니다.

교열기자가 모임을 꾸려 훌륭한 책 하나를 엮어냈어도 문화부 기자조차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교열부 기자가 바로잡은 글투와 글씨를 도로 그릇된 글투와 글씨로 돌려놓는 문화부 기자가 득시글거리는 이 나라 언론밭입니다.

<국어 순화의 이론과 실제>를 헌책방에서 알아보는 기자님도 없으나, 기자를 꿈꾸는 젊은이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글쓰기를 하고픈 새싹들은 ‘옛날 맞춤법 적’ 책으로 여겨 구경조차 해 보지 않습니다.



겉그림예전에 제대로 읽히지 않았던 책이, 오늘날에 와서 제대로 읽힐 수 있을까요. ⓒ 형성사

8. 러시아ㆍ혁명의 기록


- 엮은이 : 松田道雄
- 펴낸곳 : 동녘(1985.12.20.)


 러시아에 ‘혁명’이 있었다고 교과서에 적혀 있습니다. 미국에도 여러 가지 혁명이 있었습니다. 노예혁명이라든지, 유럽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것도 혁명이라면 혁명이 될)이.

우리나라에도 여러 가지 혁명이 있었습니다. 농사꾼들이 들고 일어난 일은 정부에서 보자면 ‘민란’이지만, 백성들 눈높이로 보자면 ‘끔찍한 세상 뒤엎어서 누구나 살 만한 세상, 푸대접과 괴롭힘이 없는 고른 세상’을 꿈꾸는 혁명이었습니다.

1960년 사월혁명은 독재자를 내쫓자는 혁명이었습니다. 비록 그 독재자를 아직까지도 ‘건국의 아버지’라며 추켜세우는 이들이 있지만.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정부에서 보면 ‘몹쓸 데모질’일 테지만, 생존권이 무너지는 보통사람들한테는 ‘혁명’을 바라는 움직임일 수 있습니다.

주한미군 범죄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이 땅에 전쟁 아닌 평화가 깃들기 바라는 마음으로 ‘미군기지 앞 집회’를 하는 일은, 이 나라 백성들로서는 혁명을 바라는 움직임이라 하겠지만, 주한미군이나 주한미군 덕분에 이익을 얻는 권력자한테는 ‘눈살 찌푸려지고 철딱서니없는 짓’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책 한 권 살뜰히 읽어, 그동안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던 세상을 깨닫고 알아가자는 글 한 줄은,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글 사이에 묻혀 사라져 버릴 수 있지만, 이런 글쪼가리 하나 남기는 사람은, 자기가 쓴 글 하나로 어느 한 사람 마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작은 힘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고 믿을 테니, 이 또한 혁명이라면 혁명이 될까요.



겉그림삶을 담은 책은 언제까지나 읽힐 수 있다고 느낍니다. ⓒ 어문각

9. 제3의 여성


- 글쓴이 : 이순
- 펴낸곳 : 어문각(1983.11.30.)


.. 걸핏하면 우리는 “국민은 정부에게 바라지만 말고, 정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 운운……” 하는 케네디의 말을 인용되는 것을 듣게 된다. 하지만 국민이 정부에게 바라지 않는다면 어디다 대고 바랄 것인가 ..  〈97쪽〉

 제가 좋다고 느끼는 책이라 해서 남들도 모두 좋다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을 테고요. 때때로 남들도 함께 읽고 좋아해 주면 어떨까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런 생각은 곧 걷힙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이 다르고, 반갑게 여기는 일이 다르며, 즐겁게 어울리는 놀이가 다르니까요.

 제가 뿌듯하게 받아들이는 책을 다른 이들이 뿌듯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음을, 다른 이들이 뿌듯하게 받아들이는 책을 제가 반드시 뿌듯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음을 보며 느낍니다. 제가 즐기는 책을 남들이 즐기자면, 남들이 즐기는 책을 나도 즐겨야 하고, 사람들이 모두 비슷하거나 같은 생각과 느낌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마음, 오순도순 어울릴 수 있고, 웃을 때는 웃고 울 때는 울면서 자연스러움을 간직하는 일은 누구한테나 들어맞을 수 있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믿고 나누자는 마음씀도 그럴 테고요. 그렇지만 서로 사랑하고 믿고 나누며 살자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방법, 믿는 크기, 나누는 모습은 저마다 다를 테지요.

 읽고 참 좋았다고 느끼는 책이 있을 때는, 제가 좋다고 느낀 책을 애써 펴내 준 사람들한테 고맙습니다. 비록 이런 책이 얼마 팔리지 않았더라도, 한때 팔리다가 이내 사라졌다고 해도, 이 책을 누군가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어 주리라 믿었기 때문에 펴내 주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도, 제가 좋다고 느낀 책을 펴낸 분 마음하고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저 책을 지금 누군가 알아보지 않으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릴 텐데 하고. 그러나 저 책뿐일까요? 제가 알고 있는 책뿐일까요? 제가 모르지만 남들은 알고 있는 책, 저는 가슴벅참을 느끼지 못했지만 남들은 가슴벅참을 느꼈던 책들도 소리 소문 없이 헌책방에서마저 자취를 감추어 버립니다. 저는 저대로, 남들은 남들대로, 저마다 믿고 아끼고 좋아하는 책을 하나둘 만나고 사들이고 간직하고 이어가겠지요. 알아보는 사람이 사고, 느낀 사람이 간직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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