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야 5년... 씨알-국가간 전쟁 터질 수 있다"
[이명원의 좌우지간⑤-1] '5·18 철학' 제창한 전남대 김상봉 교수
▲ 김상봉 전남대 교수 ⓒ 남소연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는 2000년이었는데, 당시 그는 해직교수였고, 나는 박사과정을 자퇴한 직후의 다소 의기소침한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만남의 계기는 그가 활동했던 시민운동 단체인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에서, 학벌주의의 폐해와 관련해, 특히 나 자신의 상황을 고백적으로 거론하면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제안의 당사자는 김상봉 교수였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가 '문예 아카데미' 교장으로 있을 때였다. 그 때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문예 아카데미' 기획위원이자 강사로 일했다. 그와 함께 일한 기간은 한 3개월 정도였지 싶다.
그리고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다가 2005년 인사동의 분주한 밤거리에서 우연히 어깨가 마주쳤는데, 그 때는 선생이 연고란 전혀 있을 수 없는 전남대에 특채로 임용되었을 때다. 그 때는 나 역시 한 대학의 문학선생으로 운좋게 임용되었던 시점이기도 했다, 김상봉 교수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현장 지식인에서 교수가 된 서로에 대해 축하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지 어색했던 느낌이 아직 생생하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나는, 과거의 김상봉 교수와 마찬가지로 때이른 해직교수가 되었는데, 그런 사정과는 무관하게 2007년 서울에서 그를 또다시 우연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의 상임공동의장이었고, 나는 해직교수 주제에 민교협의 편집위원장으로 있었는데, 우리가 만난 것은 광주와 서울에서의 소원했던 근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우연한 만남과 무관하게, 이번에는 내가 자청해서 광주로 그를 찾아갔다. 내 의지로 그를 만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늦더위가 아직 퇴각하지 않은 9월 초순이었고, 한국사회는 '신정아 사태'가 야기한 학벌주의 논쟁으로 시끄러웠으며,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되어 5·18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때였다. 남북정상회담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시점이기도 했다.
나는 철학자 김상봉을 만나서, 이렇게 요동치는 현실을 바라보는 철학자로서의 '깊은 시각'을 확인하고 싶었다. 왜 한국의 저널리즘은 철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무신경한가. 이런 은밀한 문제의식도 내 '광주행'의 한 근거이기도 했다.
자청해서 그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 '깊은 시각'을 보고싶었다
현실에서 드물게도 이른바 사회철학적 탐구라 할 수 있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현안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지속해왔다. <학벌사회(2004)>라는 저작을 통해 한국적 학벌사회에서의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탐구를 펼치는가 하면, <도덕교육의 파시즘(2005)>에서는 한국의 도덕교육이 노예도덕과 파시즘적 국민교육의 폐해로 점철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그런 동시에 그는 서구철학의 퇴행적 자기반영성과 나르시시즘을 비판하는 작업을 <나르시스의 꿈(2002)>과 <서로주체성의 이념(2007)>에서 펼쳤고, 최근에는 5·18 광주민중항쟁을 철학적 분석과 탐구의 장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내고 있다.
그의 저서 중에는 <호모 에티쿠스(1999)>가 더 있고, 예술론 격에 속하는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2003)>도 있는데, 이런 책들의 제목이야말로 김상봉의 철학자로서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의 철학은 한국적 현실의 비극성에 대한 윤리적 인간학에 가깝다. 동시에 그의 철학은 오늘의 현실에서 드물게 '대지의 형이상학' 또는 '땅으로 강림한 철학'의 가능성과 고투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것을 '묶인 자의 철학'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의 철학적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주체성'과 '자기의식'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20세기의 한국철학을 ‘묶인 자의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들어보자.
"20세기 한국철학은 처음부터 '묶인 자의 철학'이었다. 유영모나 함석헌 모두 식민지 피지배민족의 일원으로 철학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철학엔 지배계급의 어떠한 허위의식도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한국철학의 고유하고 독보적인 사상은 참된 의미의 민중성이다. 이전의 소수의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철학이 20세기 한국 철학에 와서는 민중의 철학, 우리가 즐겨 표현하는 씨알(민중을 일컫는 함석헌의 표현)들의 철학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유가 철학의 전제가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고 노예 상태에 있는, 억눌리고 묶인 자들이 자기를 해방시키고 도야하고 계몽하는 과정에서 씨알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인 동시에 더불어 싸우고 항쟁하는 요구하는 부름의 소리가 20세기 한국철학이었다. 이는 세계 철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철학의 새로운 보편성이다. 인류의 역사를 상기해보라. 여가 속에서 철학을 향유하는 사람들보다 자유를 박탈당하고 묶여 있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나. 이들을 배제하고 말하는 철학의 보편성은 허위의식에 갇힌 것이다. 함석헌은 철학자이면서 농부였다. 그의 존재 기반 자체가 민중적 보편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김상봉의 철학에서 무교회주의 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는 함석헌 사상과의 만남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사상적 '원체험'에 해당한다. 김상봉이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한 것은 1976년이었다. 이 시기는 긴급조치와 10월 유신으로 상징되는 박정희 파시즘 정권 말기였는데, 많은 수의 한국인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절은 그에게 "아주 끔찍한 시기"로 기억된다. 비유컨대 그토록 엄혹한 겨울공화국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철학도가 느꼈던 절망은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왜 국가 파시즘이 두발과 치마길이까지 억압하나
▲ 김상봉 전남대 교수 ⓒ 남소연
한국의 모든 철학자의 학습경로가 그렇듯, 그는 서구철학을 공부하면서 서구의 철학과 사상이 자유를 향한 투쟁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음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우스꽝스런 '머피의 법칙'과 비슷하게, 또는 어두운 부조리극과 유사하게, 그것은 다만 작고 빽빽한 활자 속의 일일 뿐, 그가 직면한 한국의 현실은 참으로 냉혹한 것이었다.
그는 책 속의 진리와 현실의 파행적 파시즘의 억압 사이의 현격한 '낙차' 때문에 절망했다. 왜 한국사는 "비굴한 침묵의 역사"에 불과한 것일까라는 질문은 고통스럽게 그의 내면에 울려퍼졌다.
도대체 왜 국가 파시즘이 정치적 자유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두발과 치마길이와 같은 개인 취향까지 송두리째 억압하는가, 이 한국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장엄하게 저항하거나 항쟁하지 않는가, 하고 고뇌했던 예민한 철학도는 대학입학시에 막 읽기 시작했던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서 한국사에 깃들고 그것이 파생시킨 함석헌의 '고난의 철학'이 뿜어내는 파토스와 에토스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 느낌이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 것은 당연하다.
"수난으로 점철된 한국사. 그럼에도 그 비극성 속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만일 있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게 물은 게 내 철학적 질문의 첫 출발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너무 뒤늦게 그를 찾아왔다. 유학을 다녀온 후에야 그는 광주민중항쟁과 6·10항쟁이 단순한 고난의 역사가 아니라, 수난에 대한 적극적인 극복의지, 항쟁과 자유를 향한 투쟁의 참다운 가치였음을 깨닫게 된다. 한국사를 '수난사'로 이해하는 함석헌의 철학에 대한 김상봉의 철학적 계승과 극복의 '겹눈'이 가능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나도 처음에는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철학적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다. 이후 유학을 다녀와서 성찰하게 된 한국의 역사 곧 5·18이 6월 항쟁으로 이어지고, 충분하진 않지만 제도화된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고 역사가 발전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것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굉장히 능동적이면서도 처절한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이라는 반성이 일었다."
함석헌의 씨알, 김상봉의 씨알
김상봉의 저작을 읽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민중을 의미하는 함석헌의 개념어인 '씨알'이라는 표현을 그의 글 도처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함석헌 자신이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를 발간한 바도 있거니와, 이 '씨알' 사상이야말로 함석헌 사상의 핵심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씨알이란 무엇인가. 심의용 숭실대 교수에 따르면 "씨알은 자신 안에 생명의 힘과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스스로의 꽃과 열매를 맺는 자발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함석헌에게 세계는 씨알의 마음이고, "하느님은 자신 안에 이 씨알들의 현실과 함께 고난과 희열을 맛보는 생명의 힘이다."(<초월로의 충동과 씨알에 의한 자치>)
그런데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김상봉에 이르면, 역사적 수난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를 위한 투쟁과 항쟁을 그칠 수 없는 민중들의 역동적 현실극복의지로 확대되는 듯하다. 씨알에 대한 이러한 변혁적인 가치부여가 한국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가능케 한 것은 분명한 듯 하다.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면서 생각해 보니 한국의 역사는 일방적인 비극적 역사가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숭고한 역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라는 저서에서 말하고 싶은 게 그것이었다. 우리 역사는 명백히 패배할 줄 알면서도 자유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씨알들이 자기를 던진 역사다. 이것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인간성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그런 인간성의 숭고가 단순히 나 자신의 개별적인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항쟁과 수난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만남이 보다 확장되고 더 깊은 방식으로 전개되어 온 것이다. 한국사는 비극의 역사나 수동적 당함의 역사가 아닌, 자유를 향한 투쟁의 역사라고 생각하자 어떤 보석 같은 인간성의 숭고, 인격의 성실함,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선물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만남을 가져오는가 하는 문제를 조금씩, 그러나 깊게 깨달아온 온 과정이 내 공부의 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 김상봉 전남대 교수 ⓒ 남소연
그는 서구철학이 말하는 자유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나타나는 원형적 자유의 '온건한 변용'이며, 자유를 위한 투쟁 역시도 과도하게 미화된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와 동시에, 서구철학 전체가 실제로는 타자에 대한 턱 없는 무지와 공격적인 배제욕망에서 출발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성, 즉 '홀로 주체성'의 철학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과 거의 동시에, 그는 '비극성' 또는 '수난사'로 인식됐던 한국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는데, 이것은 김상봉의 철학에서 일종의 '인식론적 전회'에 해당한다.
한국사는 수난사가 아니라 오히려 '씨알들의 항쟁사'였고, 자유를 향한 투쟁 역시 서구보다 훨씬 더 지속적었을 뿐만 아니라, 저항의 방식 역시 3·1운동의 비폭력적 저항으로부터 5·18의 무장항쟁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다.
노예를 만들지 않은 자유투쟁, 그것이 한국사
이러한 한국사 인식은 김상봉에게 충만한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명료한 음성으로 "가능한 모든 억압과 수탈과 이에 대한 항쟁의 유형들이 우리 역사 안에 다 들어있다"고 말한다.
"서양에서의 자유를 향한 투쟁은 한편에서는 노예를 만들면서 반대로 자기들은 자유로워지는 모순적 과정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의 노예 노동에 입각한 시민들의 자유, 농노제에 기초한 중세 특권계급의 자유, 프롤레타리아는 물론이고 식민지 수탈에 기초한 제1세계만의 근대적 자유가 그것인데, 그 점에서 우리는 보다 전면적이고, 질적으로 볼 때에도 이전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자유에의 추구를 보여준다.
노예를 만들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 모두가 더불어 자유로운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된 자유를 위한 투쟁이 한국사다. 그 점이 다르다. 서양이 아무리 고상하게 자유를 떠든다 해도, 뒤에서는 노예를 재생산하면서 자기들만의 고상한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밑바닥에서 출발한 자유이므로 누구도 노예를 만들지 않는 자유가 어떻게 가능하나는 물음이 그 속에 같이 있다. 이것이 한국의 20세기 철학이나 항쟁의 역사 그 자체가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 지점이다."
요즘 김상봉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고 있는 것은 5·18 광주민중항쟁의 철학적 의미화다. 그는 현재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어찌 보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광주에 부임했다는 우연이 5·18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필사적인 과제로 '계시'했다는 비유도 가능한 것 같다. 우연의 필연성이라고나 할까. 그는 5·18이야말로 서구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에 버금가는 철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5·18이야말로 철학적 전범으로 우리 앞에 또렷이 주어진 역사"라는 것.
그러나 5·18에 대한 학계에서의 체계적이고도 깊이 있는 철학적 검토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80년대를 경과하면서 사회과학계 일각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5·18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가 있다.
그러나 김상봉의 생각엔 계급론이나 종속이론적 관점에서의 5·18에 대한 조명은 그 한계가 명백하다. 이러한 사정과 함께 5.18의 민중항쟁적 성격을 '운동'의 차원으로 온건하게 희석시키는 현상도 우려스럽다고 말한다. 그는 형식적인 민주화 이후 5·18이 국가기구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일정하게 국가에 의한 법적 청산과 단죄, 경제적 보상의 과정을 거쳐 제도화되면서 국가권력 내부로 포섭되었고, 이것이 5·18의 역사철학적 의미를 훼손시키는 계기를 이루었다고 본다.
"200년간의 근대사는 씨알-국가기구의 전쟁"
물론 김상봉 교수가 5·18에 대한 학계의 논의 모두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가령 그는 그간의 5·18에 대한 연구 가운데 최정운 서울대 교수가 <5월의 사회과학>이라는 저서에서 펼친 '절대공동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일단 의미있게 언급한다. 그러나 최 교수 역시 5·18 당시의 광주민중들의 공동체에 '절대적'이라는 수사를 붙여, 역사신비주의적인 '주관적 경탄'에만 머무르게 하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렇다면 5·18의 역사철학적 의미는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까. 그는 한국사의 '총체성' 속에서 5·18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김상봉이 이해하고 있는 한국사의 총체성은 어떤 모습일까. 이 부분에서 충격적이랄까, 흥미로운 개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가 한국사의 총체성, 특히 최근 200년간의 근대사를 "씨알(민중)과 국가기구 사이의 전쟁 상태"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년은 씨알과 국가기구 사이의 본질적 전쟁 상태였다. 잠재적으로 내연할 때도 있었고, 현재화되어 분출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5·18이 그런 경우다. 동학농민전쟁·의병전쟁 또는 3·1 운동 이후 빨치산 투쟁, 4·3, 여순, 5·18, 6월 항쟁 등은 본질적인 전쟁 상태의 분출이다.
이제 한국역사 자체를 5·18을 기준으로 다시 써야 한다. 내재적 발전론이냐 식민지 근대화론이냐는 식의 논쟁은 서양적 이론 틀을 가져 와서 우리 역사에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는 5·18이 해석되지 않는다.
전쟁 상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역시 철학적인 문제다. 5·18은 역사 속에서 핀 꽃이다. 역사를 만들어온, 인간 역사가 발생한 존재의 장소까지 통틀어 총체성 속에서 보고 아, 어떻게 5·18이 그 때 그 순간에, 그런 양태로 분출했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총체성에 대한 사유가 철학적 사유이다. 이는 철학만이 맡을 수 있고 마땅히 맡아야 할 과제다. 5·18을 계급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근저에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있다. 서양의 유대 그리스적 전통에서 나온 게 유물사관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역사에 안 맞는다. 당연히 이를 5·18에 적용해도 안 맞는다."
▲ 김상봉 전남대 교수 ⓒ 남소연
그는 이 '고난의 현실'이 내재화된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했으며, '고난의 세계' 속에서 '씨알'이 꽃과 열매로 확장되는 변혁의 가능성을 확신했다. 그런 면에서 피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물론, 현실에 강림해 있는 국가기구라는 것 역시 씨알들의 세상에 비하면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다.
게다가 함석헌이 그의 사상을 전개시켰던 장구한 식민지시대와 독재시대는 국가권력에 의한 씨알들의 박해와 탄압이 그 어느 때보다도 흉폭했던 시기였다. 결론적으로 함석헌이 꿈꿨던 '뜻으로 된 나라'는 국가기구와 무관한 '씨알들의 나라'였다.
"이젠 자본이 씨알들을 지배한다"
김상봉 자신이 이러한 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 강렬한 영향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함석헌과 비슷하면서 다르게 김상봉 역시 그의 독자적인 '씨알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좀 거창하게 먼저 말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이라고 하는 책에서, 두 개의 나라를 말하고 있다. 하나가 신의 나라, 또 하나가 세속적인 나라다. 나는 비슷한 얘기를 좀 다르게 하고 싶다. 나는 신의 나라가 뭔지는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씨알들의 나라고, 다르게 말하면 이념의 나라, 또는 뜻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와 현존하는 국가기구라고 하는 나라가 역사 속에서 대립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인류의 역사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소수에 의해 전유된 국가기구와 씨알들이 추구하는 나라가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 것이 인류의 역사다."
씨알들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이념의 나라'와 '현실의 국가기구'의 차이는 무엇일까. 김교수는 "국가가 씨알을 적으로 돌리는가 아닌가가 하나의 구분기준"이라고 말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5·18은 국가기구와 씨알들의 전쟁상태를 가장 가파르게 보여준 사건이다.
이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도 던져 보자. 다시 그렇다면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운위되는,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오늘의 한국적 상황은 어떠한가. 그는 일단 87년 이후 20년간, 국가기구와 씨알과의 관계는 일종의 '정치적 계약관계' 상태에 있었다고 말한다. 즉 "국가가 전면적으로 씨알들을 적으로 돌리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과 상충"이 있었던 시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발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경고를 던진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정치적인 상태냐 전쟁상태냐는 유동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87년 이후에 이제는 정치적인 상태가 끝나가고 있는 단계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 그 이전까지는 폭력적인 군부가 국가기구를 전유해서 씨알들을 억압하던 시대였다. 지금은 어떤가.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본이 또는 자본가가 씨알들을 지배한다. 국가기구는 그것의 대리인 또는 하수인이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이제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하는 표현이 맞는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니고.
지금은 국가가 결코 시민들의 합의와 참여에 의해서 생성되는 서로주체성의 현실태가 아니라고 본다. 참여정부는 하나의 아이러니다. 이름은 참여정부인데, 참여정부를 기점으로 해서 시민적인 참여는 배제되기 시작했다. 국가기구가 '서로주체성'의 현실태일 때만 전쟁상태가 최종적으로 종식될 수 있다. 국가기구가 '홀로주체성'에 수렴할 때에는 씨알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얻어낼 수 없게 된다.
국가기구가 자기존립의 정당성을 확증하려고 할 때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현실적인 어떤 국가기구의 현실성 그 자체를 증명해 보여줌으로써 '내가 국가다'라고 하는 걸 국가가 여기 있다고 하는 걸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뭘 통해 보여주나? 폭력 밖에 없다. 자발적인 동의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시대가 이제 시작이다."
위의 발언에 등장하는 '서로주체성'이라는 개념은 타자에 대한 지배와 배제를 기본으로 한 서구적 나르시시즘적 주체성, 즉 '홀로주체성'의 대항 개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령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과 같은 서구적 개념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서로주체성'이란 주체가 '홀로주체성'의 세계를 지양하여 상호의존적 공동성을 갖긴 하되, 그 공동성 안에서 주체성이 휘발되지 않고, 오히려 능동적인 독자성과 연대성을 보존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요컨대 개체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사상하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의 깊은 주체성이야말로 '서로 주체성'이 아닐까.
법·국가 위에 자본이 있다
그건 그렇고, 위에서의 김상봉의 발언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의 한국적 상황, 더 정확하게는 씨알들과 국가기구와의 관계가, '정치적 계약관계'에서 급속하게 '전쟁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김상봉의 인식과 우려가 감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작금의 비정규직 투쟁을 포함한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대응방식이 이러한 상황을 측정하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 이후 국가기구와 국가권력, 그리고 법이 자본가의 이익에 노골적으로 복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최근의 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대한 태도와, 현대의 정몽구 회장이나 한화의 김승현 회장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의 이율배반을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김상봉 전남대 교수 ⓒ 남소연
국가가 약자를 보호해주지 못할 때에, 오히려 자본의 폭력에 저항하는 약자들을 국가가 법의 이름으로 먼저 나서서 억압하기 시작할 때, 그래서 노동자들이 어떤 합법적인 저항의 수단도 없을 때, 그 땐 어떻게 되는가. 그게 바로 전쟁상태다.
이랜드·뉴코아 홈에버 매장에서 쫓겨난 중년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다고 할 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이 선생은 뭐가 있다고 생각하나. 폭력적·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국가기구에 항쟁하는 거 말고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추상적으로 표현해서 국가는 시민들의 서로주체성의 현실태인 한에서 서로주체성의 표현이고, 그 실현인 한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국가가 씨알들 모두를 보호하고 최선을 다해서 씨알들 모두를 위해서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만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 국가기구 또는 헌법적 질서라고 하는 것이 법을 빙자해서 극소수의 특권 계급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때, 수탈과 억압의 도구에 지나지 않을 때에, 씨알들과 국가 사이에는 전쟁상태 말고는 다른 것이 조성될 수가 없다.
나는 길어야 5년 안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여기저기서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의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나라에서는 합법적으로 자기 권리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막혀 버렸다. 한국사회 만큼 합법적인 파업이 불가능한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파업은 다 불법이라고 한다. 그러면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뭔가. 게다가 비정규직이.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국가기구와 씨알들 사이의 전쟁상태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도 5·18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역사가 과거 어느 한때 일어난 역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다시 있을 수 있는 역사가 5·18이다."
어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국가기구와 씨알들의 전쟁상태라는 표현이 과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날 노동자가 처해 있는 상황의 비극성을 생각해 보면 이미 그 일상 자체가 전쟁상태라는 점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권위의 최종심급이라 할 수 있는 '법'에 대한 시민들의 평균적인 인식 역시, 공명정대함과는 거리가 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신뢰와 권위의 추락은 가속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석궁사건'은 그것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기는 해도 법적 형평성과 정의, 그리고 권위 추락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징후가 아닐까. 법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적 '법복귀족'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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