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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흐르는 손으로 날카로운 칼을 구겨버리다니...

추리무협소설 <천지> 284회

등록|2007.10.09 08:13 수정|2007.10.09 09:35
헌데 기이한 것은 상만천의 손이었다. 그의 우수는 다른 곳보다 훨씬 진한 황금빛을 띠고 있었는데 피가 금속(金屬)에 묻은 것처럼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역시…금강단혼수(金剛斷魂手)였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귀산노인의 입에서 침음이 흘렀다. 금강단혼수는 바로 구룡 중 금룡(金龍)의 독문절기다. 금석(金石)을 무처럼 베어낼 수 있다는 극상의 수공이 바로 이것이다. 금룡의 독문절기를 상만천이 익히고 있었다니….

피아를 가릴 것도 없이 상만천이 금강단혼수를 익혔다는 사실에, 더구나 그 위력이 눈앞에 펼쳐진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천잠보갑까지 끼었으니 십성의 경지에 달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십성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은 불문가지였다.

“불청객 때문에 흥취가 깨졌군.”

상만천은 쥐고 있던 남궁정의 연검을 종이장처럼 손아귀에서 구기며 중얼거렸다. 많지는 않더라도 피가 흐르는 손으로 날카로운 날을 가진 연검을 구겨버리고 있는 상만천에 대해 좌중은 서늘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특히 함곡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표정의 변화가 심했다. 어느새 이러한 혼란을 틈타 흑영의 손에서 천과의 손으로 넘어가 있는 함곡으로서는 절망적인 느낌을 맛보고 있었다.

‘상만천, 저 자의 무위가 저 정도라니…. 누가 당해낼 수 있으랴!’

상만천의 무위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정도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 허나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을 익히고 고련한 단 한 초식의 염황도법을 막아내고 상대를 죽일 정도로 극에 달해 있는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구룡 중 금룡의 금강단혼수마저 익히고 있을 줄이야…. 함곡의 판단으로는 자신의 일행 중에서 그래도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인물이 친구인 풍철한이다. 이미 그 무위를 보여주었고 상대들에게 두려움도 안겨주었다.

허나 무공을 모르는 함곡이라도 풍철한이 상만천의 상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거의 엇비슷한 전력이라고 판단했는데 상만천이란 변수로 인해 추가 약간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보주, 보주만이 유일한 희망인가?’

자신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상만천을 제압할 인물이라면 보주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지만 과연 보주가 자신이 안배한 계획대로 움직여 줄까? 보주는 분명 자신의 안배에 대해 눈치 채고 있을지 모른다. 허나 그 안배대로 움직여 줄지는 역시 의문이었다.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처음으로 능력의 한계를 실감했다. 역시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옛말이 틀리지 않다. 그는 체념한듯 모든 것을 하늘의 뜻으로 돌렸다. 사람인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이제 일의 성사는 하늘에 달린 것이다.

그의 절망스러운 마음과 달리 상만천은 더욱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미 자신을 드러낸 이상 확실히 상대에게 위압감을 심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이러한 경거망동에 대해서는 반드시 삼합회에 책임을 물을 것이고, 특히 남궁가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게야.”

모든 사람이 들으라는 듯, 특히 용추에게 시선을 던지며 한 말이어서 그에 대한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호오, 무섭군요. 내일부터 본 삼합회는 지하에 구멍이라도 파고 들어앉아 있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상만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궁정이 나타났던 뒤쪽에서 여러 인물들이 모습을 보였고, 가장 앞서 나온 삼합회의 회주인 궁단령이 던진 말이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고, 그렇게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만천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 억울할 뿐이었다.

“…”

헌데 궁단령의 뒤로 설중행과 능효봉이 모습을 보이고 좌등과 진운청마저 나타나자 추태감과 상만천의 얼굴에 약간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결국 소림의 땡중과 화산의 말코도사 놈들이 좌등 하나 잡아두는 간단한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언짢음이었다.

“지하에 구멍을 파고 숨어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용추 역시 약간 기분이 상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삼합회는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경고였고, 협박이었다.

“그럼 우리는 꼼짝없이 죽는 수밖에 없겠군요. 물론 상대인이나 용추선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다르겠지만요. 호호.”

명백한 도전이었다. 이제는 정면으로 한 번 붙어보자는 말이다. 누가 먼저 죽는지 해보자는 말이다.

“지금까지 와신상담했다는 말인가? 좋지. 그렇지 않아도 도전을 해오는 자들이 언젠가부터 사라져서 한편으로는 서운했었지. 그래도 잠시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군. 나는 네년 같은 냄새나는 계집보다 호탕한 사내에게 관심이 많아.”

상만천의 자신감의 끝은 어디일까? 그는 노골적으로 삼합회의 궁단령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다시 돌려 풍철한을 바라보았다.

“조금 지체되었군. 하기야 그래야 좀 공평해진 것 같지 않은가? 잠시라도 쉴 시간이 있었으니 말이야.”

숨은 어느 정도 고르고 있었지만 아직도 본래의 낯빛을 찾지 못하고 있는 풍철한을 보며 상만천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여전히 풍철한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상만천이 자꾸 풍철한을 자극해 자신에게 덤벼들게 하려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이미 함곡이 자기들 손에 들어온 이상 승기는 이미 자신들에게 기울었다고 생각했다. 함곡과 더불어 상대 일행의 수장으로 판단되는 풍철한만 꺾어 놓으면 이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언제든지 손을 떼고 돌아설 수 있는 교두들이나 육파일방의 인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확실하게 붙잡아 두려는 심사도 스며있었다.

“아무리 지쳤어도 당신 정도야 언제든지 상대해 줄 수 있소. 나는 내 이름을 앞세우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광검 풍철한이오.”

풍철한 역시 상만천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다. 아무리 상만천이 구룡의 무공을 익혔다 해도 풍철한이 어디 기죽을 인물인가? 그런데 그때였다.

“구룡의 무공을 훔쳐 배운 자라면 응당 내 손으로 처리해야 마땅한 일. 나에게 양보해주시는 것이 어떻소?”

궁단령의 뒤쪽에 모습을 보였던 능효봉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태산과 같이 묵직한 걸음걸이다. 더구나 그의 기도 역시 얼마 전과는 달리 진중하고 무게가 느껴진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제까짓 게.”

능효봉이 나서자 일행에 끼어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뒤에 처져서 조용히 있던 상교교가 불쑥 나서며 종알거렸다. 심각한 상황에서 상교교의 종알거림은 긴장감을 한 순간에 깨버리는 철없는 짓이어서 그녀를 흘낏 돌아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버릇이 없다고 해도 사실 그녀가 나설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능효봉의 섬광 같은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갑자기 능효봉의 눈빛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비수가 폐부를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능효봉의 눈을 피하며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네년을 홀딱 벗겨 나무에 매달아 두고 싶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참겠다. 하지만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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