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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라면 죽고 못 살았던 사람

[어느 스쿠버다이버의 물속이야기 4]

등록|2007.10.09 12:06 수정|2007.10.09 13:07
용치놀래기

‘김지미’라는 물고기가 있다. 이 이름은 한 시대를 풍미한 대 여배우의 이름이다. 한 시절 그녀의 이름은 ‘절세가인’과 동의어이기도 했다.

“저 이름이 왜 붙었지요?”
“물고기가 예쁘다고 그랬겠지요.”

용치놀래기 울릉도, 수심25m, 용치놀래기 두 마리가 모자반 숲 속을 가로지르고 있다. 놀래기 두 마리 사이로 하강하는 다이버가 보인다. 우리나라 연안의 대표적 어종이다 ⓒ 장호준


사람들은 용치놀래기를 김지미라 부른다. 그 화려했던 여배우의 미모와는 달리 용치놀래기는 그렇게 모양새가 예쁜 고기는 아니다. 배색이 열대 고기처럼 알록달록하다보니 웬 싱거운 어부가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낚시꾼에게도 다이버에게도 그리 환영받는 물고기는 아니다. 맛이 없어서다. 그래서 꾼들도 이 고기는 외면하고 지나간다.

물고기도 자신이 어떻게 대접받고 있는지 쯤은 안다. 그래서 이 고기들은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 움직임도 아주 활발하고 경쾌하다. 유쾌한 고기인 것이다. 우리나라 전 연안에 걸쳐 살고 있다.

용치놀래기를 보며 오늘은 저 고기가 관심권에서 멀리 있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며 조마조마 했다. 왜냐하면 어제까지 사료로나 썼던 쥐치나 아귀, 물텀벙, 들이 오늘은 고급어종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연안 어류자원의 고갈이 불러온 결과다. 앞으로 해양환경이 그렇게 변해 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가 오래가지도 않았다. 기어코 나는 부산의 한 횟집 수족관에서 손가락보다 조금 더 굵은 저 용치놀래기를 발견했다. 횟집주인은 손님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기가 보기도 좋지만 새꼬시 해 놓으면 참 맛있어요.”

이제 저 고기도 사람에게 필요할 것이다. 씁쓸한 일이었다.

다이빙 마니아들

모자반 숲 우리가 바다 말이라고 부르는 해조류이다. 길이가 30m 씩 자라는 것도 있다. 그 숲 바닥에서 한 다이버가 수중카메라를 수면 쪽으로 쳐들고 있다. ⓒ 장호준


다이빙 마니아의 귀에는 바다가 끊임없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다.

물론 바다는 아무 말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마니아의 귀에는 바다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들어가 봤던 바다 속이 황량하면 황량할수록 다이버는 다음 다이빙을 서두른다. 물론 이것은 아무에게나 오는 증상은 아니다. 이런 느낌이 들면 '자신이 다이빙 마니아가 되어가는 조짐이 보이는구나'하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느낌에 아주 쐐기를 박는 바다가 있지만 그 장소는 개인마다 다르다.

어느 바다의 한 곳에 떨어져 그 지점에 매료되어 버리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봤던 바다가 떠오른다. 비로소 날마다 머릿속에 바다를 그리는 한 사람의 마니아가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사는 D시에서 처음 다이빙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행적은 이제 거의 전설이 되었다. 물이라면 죽고 못 살았던 사람,  평생을 물과 함께 했던 사람, 그러나 지금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당시 D시에서는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60년대 말에  미국에서 다이빙을 배워 와 친구와 선후배들에게 다이빙을 보급했다. 물론 나는 그 분이 다이빙 보급을 하며 어떤 철학을 지녔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설령 그가 개인의 호사를 위해 그렇게 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가 다이빙계에 끼친 공적은 무시 할 수가 없다.

그는 다이빙에 대단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잠수복이 없어 청바지를 입고 다이빙을 하던 그 시절에 다이빙 클럽을 만들고 다이빙 장비를 사들이고 했으니….

그는 그 눈부신 재화로 배를 전세 내어 남해안을 일주했고 동해안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그 시절 다이빙을 꿈도 꿀 수 없던 주위 사람들에게 다이빙을 가르친 것이다. 물론 이에 필요한 경비는 일체 그가 부담했다.

세월이 흘러 그는 가고, 다만 그의 행적만이 전설처럼 남았지만, 그의 호쾌한 기상과 다이빙에 쏟은 열정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그가 한 시절 즐겨 드나들었던 동해연안 바다 속에 그를 추억하고 기념하는 수중비석을 세웠다.

어민들과의 충돌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다이버가 어촌에 나타나면 동네주민들이 구경을 나왔다. 거기다가 주민들은 어디에 가면 어떤 고기가 있으니 거기에 한 번 들어가 보라든지, 요즘 문어철이니 문어가 보이거든 그냥 나오지 말고 한 마리 잡아주고 가라든지 하는 말을 하며 탱크도 날라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다이버에게는 꿈같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어민들과 다이버들 간에 서서히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다이버들 때문이었다. 마구잡이 물고기사냥에 일부 다이버들은 바다에 뿌려놓은 전복 등의 종패를 훔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민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충돌이 도처에서 일어나다가 드디어 어민들은 다이버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막기 시작했다. 물론 어민들에게 다이버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권리는 없었다. 그러나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어민들과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그 다이빙이 기분 좋은 다이빙이 될 리가 없었다.

넙치동해 양포, 수심 10m, 자신의 은신술을 믿고 카메라를 들이대도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자리를 옮기는 순간이다. ⓒ 장호준


다이버들도 이를 그대로 수용할 리가 없었다. 그 때는 다이빙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어민들 눈치를 볼 생각을 하면 출발도 하기 전에 김부터 빠지고는 했다

여기저기서 과격한 언사나 행동이 터져 나왔다. “다이버는 전부 도둑놈이고, 그래서, 다이버는 얼굴만 봐도 밸이 꼴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카메라를 보여주며 사진을 찍을 뿐이라고 해도 어민들은 불신을 거두어 들이지 않았다. “전복을 훔쳐 넣을 데는 얼마든지 있다” 는 것이었다.

이렇듯 지역 어민들의 이해가 없으면 다이빙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심지어 나는 동해안에서 비치 다이빙을 하고 나오다가 식칼을 들고 죽이겠다며 뛰어 온 주민을 만난 적도 있다. 다이버들에 대한 불신이 이와 같았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일본 어촌에서 일어난 일들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으면 해답도 있는 법이다. 서로 상처뿐인 일이 오래 갈 리가 없었다. 다이버를 상대하여 돈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사람들이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이버들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자, 다이버를 실어 나르는 어선의 수가 늘고, 어촌식당의 매상이 오르고, 비수기에도 민박집의 방이 나갔다.

지역민 중에는 다이빙 숍을 여는 사람도 있었다. 다이버들 중에도 어촌계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어민들을 설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서히 어민들과 다이버들이 타협을 보기 시작했다. “환경을 깨끗이 하라, 전복 같은 것에는 손을 대지 마라, 마을에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짓을 하지마라” 등등

지금은 제주도의 문섬과 같은 특정 지점에는 다이버들이 이 지역 경제의 한 축을 지탱할 만큼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젠 꾼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돈을 내고 고기를 잡으라는 유어장까지 생겨 뜻있는 다이버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곳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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