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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섭을 안 묵어서 그런가 참 큰일이라"

무른 것밖에 못 잡수시는 아버지, 거친 음식도 드셔야죠

등록|2007.10.09 15:21 수정|2007.10.09 16:19
아버지가 주무시는 모습을 슬쩍 봤다. 입을 약간 벌린 채 주무신다. 틀니를 뺐는지 입 안이 홀쭉하다.

아버지는 수시로 주무신다. 아침 잡숫고 한숨 주무시고 낮에도 한숨 주무신다. 힘이 없으니 눕기만 하면 잠이 온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그 옆에서 나도 낮잠을 잔다.

아버지를 모셔오기 위해 방을 치웠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난방을 하는 구들방에 침소를 봐두었다. 그 방은 거실에서 바로 연결되므로 아버지가 계시기에도 좋은 방이다.

하지만 그 방은 오르내리기가 약간 불편한 단점이 있다. 본래 마루였던 곳을 개조해서 거실로 만들었던지라 우리 집 거실은 방보다 낮다. 안방은 수리를 할 때 구들을 없애고 키를 낮췄지만 작은 방은 구들을 그대로 살려두었기 때문에 키가 높다. 그래서 무릎 높이 정도의 문지방을 넘어야 작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난봄에 아버지가 오셨을 때 작은 방에 거처를 마련해 드렸다. 저녁마다 군불을 때서 방을 따끈따끈하게 해 드렸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거였다. “등더리가 뜨뜻해서 좋다”며 흡족해 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방에서 거처를 안 하신다.

다리 힘이 없는 아버지, 작은 것에 걸려도 비틀

▲ 밥 드신 뒤엔 꼭 약을 챙겨 드셔야 한다. 밥 한 공기에 약 한 줌, 늙고 병들면 약 힘으로 사는건가... ⓒ 이승숙


다리 힘이 없는 아버지는 작은 것에 걸려도 비틀거리기가 일쑤였다. 밤에 주무시다가 한 번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곤 하시는 아버지는 비몽사몽간에 방에서 나오다가 비틀거린 적도 있으셨던가 보다. 아버지가 방에 드나들 때마다 조금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 물어봤다.

“아부지요, 방에 오르내리기가 불편하지요? 여게 거실에서 주무실랍니꺼?”
“옹야, 오르내리기가 쪼매 힘드네. 여게서 자꾸마.”

그 날부터 아버지 거처는 안채 거실이 되었다. 거실에 전기장판을 깔아놓고 아버지가 아무 때나 눕고 싶을 때 누울 수 있도록 해드렸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치아가 건강하셨다. 그래서 생선 가시도 안 버리고 다 씹어 드셨다. 하지만 세월은 무상해서 그 건강했던 치아가 다 탈이 났다. 하나하나 아버지 곁을 떠나더니 결국엔 틀니를 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 틀니마저도 잇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불편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지금은 딱딱한 거는 일체 못 드시고 무른 반찬만 드신다.

더구나 수술 후 몸조리를 하면서 매운 음식을 한동안 안 드신 이후로 매운 것도 못 드신다. 조금만 매워도 못 드시니 드실 게 별로 없다.

무른 것만 드셔서 변비도 생기고

딱딱한 것도 못 드시고 매운 것도 못 잡수시니 아버지는 늘 죽이나 국을 끓여서 밥을 드셨다고 한다. 그랬더니 여름 무렵엔 그만 입병이 나고 말았단다. 입 안이 헐어서 도통 음식을 못 먹겠더란다. 아버지 짐작으로 아마도 비타민 부족으로 생긴 병 같아서 비타민을 사서 먹었더니 입병이 좀 낫더라고 하셨다.

아버지를 위해서 늘 무른 반찬과 국을 끓인다. 별 거 아닌 거 같은 반찬 준비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이 것 저 것 아무 거나 다 드시면 반찬 만드는 게 일이 아닐 텐데 못 잡숫는 게 많으니 끼니 때만 되면 빈약한 밥상을 보면서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한 번도 타박한 적 없이 늘 달게 드신다.

▲ 이야기 보따리를 한 번 풀면 그칠 줄을 모릅니다. 듣다가 남편에게 그 역할을 맡겨버리고 슬며시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 이승숙


어제 점심은 아침에 먹다가 남은 다슬기 국에다가 어묵조림을 데워서 다시 냈다. 그리고 열무물김치를 한 보시기 담아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웬일로 열무김치를 다 드시는 거였다. 씹지 못하니까 김치는 통 잡숫지 않았는데 그 날은 젓가락이 자주 열무김치에 갔다.

슬풋 담은 밥 한 공기를 다 비운 아버지가 빈 그릇을 챙겨주며 그러셨다.

“오랜만에 김치 맛나게 먹었네. 열무가 보들보들한 기(게) 연하고 맛있네. 늘 무른 거만 먹어서 그런지 변이 잘 안 나와. 아무리 안 돼도 이틀에 한 번은 변을 봐야 하는데 어떤 때는 사흘이고 나흘이 지나도 변이 안 나와. 용을 써도 기미가 없고 나온다 캐도 똑 염소똥맨치로 쪼맨치 나오니 이기 참 큰 일이라. 거섭(거친 거)을 안 묵어줘서 그럴 끼라.”

"거섭을 묵어야 되는데..."

변비기가 있는 아버지를 위해서 일부러 나물 반찬을 해드리지만 장 운동이 원활치 않아서 그런지 변비기가 있다 그러셨다. 매운 것도 못 드시지, 질기고 딱딱한 것도 못 드시지, 아버지가 드실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아부지요, 이 안 좋으마 묵을 끼 별로 없겠네요. 묵는 재미가 큰데 묵을 끼 없으마 사는 재미도 마이 줄겠심니더.”
“그케, 이 안 좋으마 묵을 끼 마이 없지. 묵어도 맛이 지(자기) 이만 몬 해.”

밥공기에 슬풋이 담긴 아버지의 밥을 보며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장인어른 밥 좀 더 많이 담지 그래? 밥 많이 잡수셔야 기운이 나지.”

많이 드셔야 기운이 나지만 드신 거 다 소화 못 해내도 일이니까 잡술만큼만 담는다.

오늘 아침에도 열무김치를 상 위에 얹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김치 쪽엔 그다지 젓가락을 옮기지 않는다. 생 양파 썬 것만 많이 드신다.

아버지가 우물거리시며 반찬을 씹는다. 틀니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딱딱 들린다.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내 아버지니까 참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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