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와 나> 포스터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자, 왼쪽 사진을 먼저 보시겠어요? 연극 <코끼리와 나>의 포스터를요. 배우 오달수가 상투를 틀고 조선시대 복장을 하고 있군요. 그런데 오달수, 코끼리 머리 위에 앉아있네요?
<코끼리와 나>는 태종실록에 기록돼 있는 조선 최초의 코끼리 이야기를 극화한 작품입니다. 사실 저, 연극을 보기 전 생각했어요. 이 연극은 어쩌면 ‘코끼리와 오달수’일지 모른다고요. 조선에 나타난 코끼리 때문에 좌충우돌하는 오달수의 코믹연기가 볼 만 하겠네, 라고.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야 제 짐작은 그저 짐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죠. 약간 서투른 부분도 있었지만 이 연극, 꽤 진지했으니까요. 고쳐 생각합니다. 이 연극의 본질, 아마도 ‘너와 나’일 거라고.
먼저 줄거리를 대강 들려드리죠. 때는 태종 11년(1411년), 일본국에서 조선의 대장경을 얻고자 전략적으로 코끼리 한 마리를 친선예물로 보냅니다. 난생 처음 본, 희한한 동물 앞에서 왕과 조정은 혼란에 빠지네요.
조정은 말썽만 피우는 데다 위협적이기까지 한 이 코끼리를 다룰 사람을 찾아 나서고, 때마침 ‘날뛰는 소를 능란하게 다루는’ 소도둑 쌍달(오달수 분)을 만나게 됩니다. 일개 소도둑이 갑자기 어명을 받드는 난감한 처지가 된 것이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신하가 코끼리에게 밟혀죽자 쌍달은 코끼리 대신 형사재판을 받고, 코끼리와 함께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여기서 잠깐, 잠깐요. 이 연극, 인터미션 10분을 제외하고도 공연시간이 140분이나 되네요.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1막의 이야기입니다. 1막에서 나오는 주요한 대사들을 살펴볼까요.
①조정 대신들이 임금에게 아뢰는 대사 : “난생 보도 듣도 못한 기이한 짐승이라 하옵니다”
②내시의 목이 코끼리의 코에 의해 졸리자, 내시가 경악하는 대사 : “물컹물컹하면서도 까칠까칠하기도 한 이것이 무엇이냐?”
1막에서 나오는 모든 이들은 코끼리를 보고 놀라고, 이는 곧 두려움과 연결되는군요. 우습다고요?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들과 똑같답니다. 미지의 것, 친숙하지 않은 것,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 그런 것들을 접할 때 우리는 두렵지 않은가요? 가두려 하고, 배척하려 하고, 그래서 결국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지는 않는지요? 자신만의 틀 안에 갇혀서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을, 결국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상황을 <코끼리와 나>의 1막은 우스꽝스럽게 그리는 셈이어요.
▲ <코끼리와 나>의 한 장면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다시 연극 속으로 돌아가죠. 2막이 오르자 제주도로 유배온 쌍달과 코끼리… 아니 흑산이(쌍달은 “까마귀보다 검은 데다 덩치는 산(山)만하다”며 코끼리에게 ‘흑산’이라는 이름을 붙여줘요)가 보이네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쌍달은 처음엔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흑산이에게 정이 들기 시작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귀신을 물리치자’면서 쌍달을 해치려고 할 때 흑산이가 쌍달을 도와주기도 하죠.
쌍달은 흑산이에게 정이 들고, 흑산이는 쌍달을 도와준다… 연극 <코끼리와 나>의 관람 포인트입니다. 서로 교감한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 말이에요. 결국 흑산이의 등에 탄 쌍달이 꽃밭을 거닐면서 흑산이에게 말하는 대사를 들어보세요.
“이상하지? 너랑 같이 있으면 내가 임금님이 된 것 같다. 이 세상의 임금님이 된 것 같다.”
정말 이상하지요. 같이 있는 대상은 똑같은데, 쌍달의 마음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고 있으니. 그 마음자리가 오가는 중심에는 이해와 노력이 있지요. 너와 나를, 서로만의 우주를 이해하려는 아름다운 마음.
▲ <코끼리와 나>의 한 장면. 오른쪽 배우들이 코끼리를 표현하고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연극은 더 진행이 되지만 이야기는 이만 여기서 접을게요. 곁가지로 다른 에피소드들이 많이 나오지만, 솔직히 군더더기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요. 특히 종종 등장하는 ‘일본국과 조선의 대립’ 장면들은 이 연극의 중심을 해치는 것 같아 불쾌하기도 했으니. 그러나 앞에서 설명해 드린 <코끼리와 나>의 핵심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은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겨요.
덧붙여, 이 연극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여러 신선함을 안겨줬답니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코끼리’를 다양하게 형상화하는 연극적 표현들이에요. 관객들이 처음 볼 수 있는 어둠 속 코끼리의 윤곽은 강렬합니다. 이어서 9명의 배우들이 코끼리의 코, 엉덩이, 다리 등의 역할을 앙상블로 표현하는데,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꽤 놀라워요. 극의 흐름을 고조시키는 타악기 위주의 라이브 음악도 인상적이랍니다.
▲ <코끼리와 나>의 한 장면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자, 처음 보셨던 사진을 다시 보시겠어요? 해바라기 꽃이 보이네요. 연극에서 쌍달과 흑산이가 비로소 소통할 때 무대 위에도 해바라기 꽃이 활짝 핀답니다. 이해제 연출가는 어떤 의미로 이 꽃을 사용했는지 모르나, 저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바로 이 문장들이 생각났어요. 오래된, 그러나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 문장들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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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시간 : 평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4시ㆍ7시, 일요일ㆍ공휴일 오후 4시(월요일 쉼)
공연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티켓가격 : R석 3만원, S석 2만원
문의ㆍ예매 : 1544-5955(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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