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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두려운 건 그 뒤의 존재감 때문이다

추리무협소설 <천지> 286회

등록|2007.10.11 08:51 수정|2007.10.11 08:55
“자네 지금 농담하고 있나? 이게 장난인가?”

입에서 나오는 말의 절반 정도가 농담인 풍철한마저도 함곡이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함곡으로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이들의 손에 붙잡혀있는 한 풍철한으로서는 대처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만들고 최대한의 실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 현명한 결단이다.

“장난이라니.....? 이제 내 역할은 이제 끝났네. 이제부터는 자네와 모두들의 몫이야. 어차피 내가 이 일에 끼어들려고 결심했던 그 순간부터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네. 내가 죽는다 해도.... 그리고 내가 살아있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네. 이제 모든 것은 자네에게 달려있네.”

애써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사라지게 하는 길이 조금이라도 승리할 확률이 높았다. 자신은 이제 비켜나고 풍철한이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한다.

“자네.....?”

이미 함곡은 삶에 대한 미련을 버렸음일까? 그의 얼굴에는 체념이라기보다는 마음을 비운 듯한 평안함이 나타나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말게..... 귀산어르신과 우슬소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리고 능대협과 설소협이 다른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이 생사림을 웃으면서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 될 것이네.”

풍철한에게 말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자신이 이들의 손에 붙잡혀 있더라도 전혀 개의치 말라고 재차 강조하는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는 머리가 아닌 무공으로 결판을 내야 하는 시기였다.

다만 이 생사림 안에서 술래잡기를 하라고 했던 것은 아무리 진이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지형을 잘 아는 귀산노인과 우슬이 있는 한 다소 유리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고, 이것을 깨우쳐 주려고 했던 것이다.

상만천의 무위가 밝혀지고 위충현의 이신(二臣)마저 나타난 이상 정면으로 부닥칠 경우 다소 불리할 것이란 함곡의 생각이었다. 다만 우슬과 귀산노인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해준다면 엇비슷해 질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함곡만의 달콤한 오해였다. 귀산노인 역시 무공을 익히기 어려운, 아니 무공을 익히려고 했지만 한계를 가진 체질로 인하여 상승의 무공을 익히지 못했던 것이다. 귀산노인 역시 두뇌를 쓰는 인물이었지 무림인은 아니었다.

우슬 역시 마찬가지. 잠룡의 무공은 거의 칠성 이상의 수준에 도달해야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허나 우슬이 사부로부터 직접 단계적으로 무공을 수학하기는 했지만 아직 연륜이 짧은 관계로 상승의 무공을 익히기는 어려웠던 상황. 그녀 역시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 

“어떻소? 내 제안이....?”

함곡은 시선을 돌려 상만천과 추태감을 보고는 마지막으로 용추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린애가 아니었다. 함곡의 제안은 뻔한 수작일 뿐이었다.

“지금 자네는 장난을 치려 하는군. 자네는 말 한마디로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상만천이 냉소를 치며 말했다. 함곡이 피식 웃었다.

“장난이라... 장난일 수도 있소. 허나 재미있지 않겠소? 또한 내 목숨을 가지고 위협하려는 생각은 마시오. 아까도 말했듯이 어차피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오.”

“자네야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과연 저들이 그렇게 생각할까? 자네가 저들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까 말이네.”

용추가 비웃듯이 말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누이동생인 선화는 물론 풍철한 역시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을 터였다. 함곡이 또 다시 피식 웃었다. 붙잡혀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 여유가 있었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소? 어차피 동림당원과 함께 벌써 죽을 목숨이었소. 용추형께서 조금 봐주고.... 철담어른이 애써 막아주지 않았다면 나뿐만 아니라 내 아내와 선화마저 이미 동창의 검은 손에 의해 살해되었을 거요. 아직까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이렇게까지 거사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에 대해 또한 더욱 감사할 따름이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태도다. 이미 죽었을 목숨이었지만 다행히 여벌로 산 삶이었기에 아까울 것도 없다는 모습이었다. 이것은 용추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풍철한이나 선화에게 하는 말도 되었다.

-- 내 안위와 생사(生死)로 인하여 일을 그르치지 말기를.......

그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 뒤의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죽고 난 뒤의 자신의 존재가 어찌 되는지에 대한 무지(無知)의 맹목적인 두려움일 뿐..... 육신을 버리고 영혼이 존재할 수 있다면 또한 그리 억울해 할 일도 아닌 터.

“술래잡기를 하든...아니든... 나는 상관없다.... 그것들은 당신들이 할 일.....”

흑영... 흑교신이 고막을 틀어막고 싶은 음성을 토하며 풍철한 쪽으로 한 발 나섰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도저히 풍철한을 용서하지 않을 태세였다. 더구나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인물은 이곳에 오직 한 사람, 추산관 태감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나서는 데에 전혀 간여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좋지.....”

풍철한 역시 물러날 마음은 없었다. 다만 함곡이 저들에게 붙잡혀 있는 것이 신경 쓸 일이었고, 또한 함곡이 바라는 바는 이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경거망동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저 자는 내가 맡겠소.’

헌데 그때 전음이 풍철한의 고막을 파고들며 그의 곤란함을 벗어나게 해 준 인물이 있었다.

“어이.... 괴물....!”

능효봉의 뒤에서 장난스레 말을 뱉으며 나서는 인물은 바로 설중행이었다.

“술래잡기 하자고 했잖아? 나하고 한 번 술래잡기 하는 것은 어때?”

말과 함께 설중행은 느닷없이 신형을 날리며 흑교신의 얼굴을 향해 두 발로 차갔다. 너무나 급작스럽고 빠른 공격이어서 오히려 흑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파파팍----!

소림의 무상각이다. 더구나 실전적인 부분만 익힌 것이어서 더욱 매섭기 짝이 없었다. 헌데 흑교신은 너무나 쉽게 피했다. 그렇다고 몸을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목이 직각으로 꺾였을 뿐이었고, 얼굴을 노린 설중행 두발은 허공을 갈랐다.

“헛....!”

누군가 몇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냥 서 있다가 고개가 직각으로 꺾인다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흑교신은 목이 부러진 듯 툭 꺾었고, 그것으로 설중행의 공격을 자연스럽게 피했던 것이다.

동시에 허공에 떠있는 설중행의 다리를 잡으려 팔을 뻗었는데 워낙 긴 팔이다 보니 그렇게 보인 것인지 모르지만 팔이 죽 늘어나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보통사람의 공격이라고 생각하고 피했다가는 꼼짝없이 붙잡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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