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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가는 미국가정 파헤친 사립탐정

[불멸의 탐정들 7] 루 아처

등록|2007.10.11 10:42 수정|2007.10.11 11:24

▲ <소름> ⓒ 동서문화사

루 아처는 전형적인 미국의 사립탐정이다. 셜록 홈즈나 브라운 신부처럼 조용한 영국신사와는 거리가 멀다. 루 아처는 점잖게 사람들을 상대하거나, 뛰어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온종일 차를 몰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계속 질문을 퍼붓는다. 작품 속의 한 여성은 그에게 '당신은 오직 질문만 하는군요'라고 말할 정도다.

루 아처는 로스앤젤레스의 사립탐정이다. 그는 한번 결혼했던 경력이 있고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과거에는 경찰을 직업으로 했지만 곧 그만두고 말았다.

아처의 말에 의하면 돈이 주요인은 아니었다. 숨막히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고, 더러운 정치도 싫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만둔 것이 아니라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직 경찰이었던 사립탐정 루 아처

그래서 그는 경찰일을 그만두고 탐정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등장하는 첫 작품인 <움직이는 표적>에서 그의 나이는 대략 35세가량이다. 루 아처가 나오는 작품들은 모두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주인공 루 아처는 거리를 뛰어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때로는 얻어터지기도 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작품 속에서 그에 대한 상세한 신상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일 아닐까. 그래서 루 아처에 대한 신상은 모두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루 아처의 외모는 이렇다. 조금 천해 보이지만 꽤 잘 생겼고, 머리는 검고 눈은 푸른빛이 도는 잿빛이다. 키는 1m 88cm 정도에 몸은 건강하고 근육이 단단해서 마치 운동선수처럼 보인다. '사립탐정'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인상처럼, 훤칠한 키에 강인한 육체를 가진 셈이다. 처음보는 여자에게는 소년같은 미소를 보내서 호감을 얻기도 한다.

그는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는 것처럼 일도 혼자서 한다. 별다른 비서도 없고 일을 맡길 부하 직원도 없다. 대신 미국 곳곳에 알고 있는 다른 사립탐정이 있고, 시내에도 알고 있는 경찰과 공무원들이 있다. 가끔씩 그들에게 협조를 요구할 뿐이다. 그외에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한다.

혼자이기 때문에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나쁜 점은 온갖 자질구레한 일도 모두 그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가할 때면 수표책을 펼쳐서 수입과 지출 관계를 점검하고, 전화요금 등의 간단한 청구서를 처리한다. 바쁜 와중이라도 청구서의 지불기한을 넘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신문의 광고란까지도 자신이 직접 모두 읽어본다.

좋은 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활동을 통해서 생기는 수입을 모두 자신이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경찰을 그만두고 사립탐정으로 개설한 다음에 그는 수입이 더 좋아졌을까? 1949년 작품인 <움직이는 표적>에서 그는 일을 해봐야 1주일에 300달러가량의 수입을 얻을 뿐이었다.

그런데 1963년 작품 <소름>에서는 의뢰인에게 하루에 100달러와 그 밖의 활동비를 요구한다. 로스앤젤레스의 경찰 월급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그에 못지않은 괜찮은 수입이 될 것도 같다. 물론 일이 끊이지 않아야 이런 수입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테지만.

가정 문제를 주로 다루었던 탐정 루 아처

▲ <지하인간> ⓒ 동서문화사

루 아처는 의뢰인에게 고용되어서 사건을 해결하고 수입을 올린다. 탐정일을 시작한 초기에 그는 주로 이혼문제를 다루었다.

자신이 직접 '주로 이혼문제를 맡는다'라는 말을 하는가 하면, '실종자를 잘 찾지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에 의하면 루 아처는 복잡하고 피비린내나는 살인사건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인물이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루 아처가 다루는 영역도 조금씩 변해간다. <소름>에서 루 아처는 의뢰인에게 '이혼 상담이라면 난 받지 않고 있는데요'라는 말을 할 정도가 된다. 루 아처는 그동안 돈을 많이 벌어서 배가 불러진 것일까.

'주로 이혼문제를 맡는다', '이혼 상담은 받지 않는다'. 이 두 가지 말에는 루 아처가 담당하는 사건들의 핵심을 짚어내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그가 맡는 사건들은 대부분 가정 문제이다. 그 문제는 이혼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이혼과는 관련이 없는 일들이기도 하다.

루 아처를 찾아오는 의뢰인들은 십중팔구 어떤 실종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의뢰인은 실종자의 가족인 경우가 많다. 실종자는 여러가지 부류다. 얼마전에 결혼한 신부일 수도 있고, 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여대생일 수도 있다. 돈 많은 석유재벌이기도 하고, 영문도 모른채 납치당한 어린소년일 때도 있다.

루 아처는 이런 실종사건을 접하면 탐문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실종자의 주변인물들을 만나보고, 주변에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다른 정보들을 수집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실종사건은 살인사건으로 발전한다. 처음에는 작아보이던 일이 점점 커져간다. 실종자 주위로 여러 명의 인물들이 얽히고 설킨다. 그리고 결국에는 한 가정의 추악한 면이 드러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 된다.

그 추한 면에는 점점 붕괴되어가는 미국의 가정이 담겨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어떤 여자는 시누이의 남편과 성관계를 통해서 아기를 갖는다. 반듯한 가정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장년의 남성은 부인을 제쳐두고 다른 2명의 여자와 차례로 이중결혼을 시도한다. 딸은 집나간 아버지를 찾아서 떠나고, 아들은 도망간 어머니를 그리며 거리를 헤맨다.

어떤 남자는 곧 결혼할 여성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시도한다. 결혼한 남성을 상대로 고등학교 교사와 제자가 차례로 성관계를 갖는다. 루 아처가 등장하는 작품들에는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 부부사이의 증오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집안들은 시쳇말로 '콩가루' 집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미국 가정의 위기를 묘사한 작가 로스 맥도날드

'루 아처 시리즈'를 만든 작가는 미국의 로스 맥도날드다. 그는 어린시절에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어린시절에 부모가 이혼해서 아버지는 떠나고, 로스 맥도날드는 어머니를 모신 채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생활했다고 한다. 어린시절의 이 경험은 작가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였을까? 미국의 작가 스티븐 킹이 소외된 아이들을 주로 다루는 것처럼, 로스 맥도날드도 자신의 경험 때문에 파탄난 가정을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그런 사건들을 바라보는 루 아처의 모습이다. 그는 여러 단서들을 분석해서 명쾌한 추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계속 질문하고 쉴새없이 뛰어다니며 주변 인물들의 답변을 하나씩 끼워맞춘다. 1인칭 주인공의 시점으로 작품은 전개되지만, 루 아처는 작품속에서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때로는 총으로 위협받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속으면서도, 그는 여간해서는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사건이 해결돼도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하고 그에 따른 보수를 챙겨갈 뿐이다. 엉망이 되어버린 가정문제를 계속 다루다보니까 그도 신경이 무뎌졌을지 모른다. 아니면 루 아처 자신도 이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려고 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흔히 루 아처를 가리켜서 새뮤얼 스페이드, 필립 말로우의 계보를 잇는 하드보일드 탐정으로 지칭한다. 작가 로스 맥도날드는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의 계승자로 꼽힌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보기에는 로스 맥도날드의 작품세계가 너무 독특하지 않았을까?

흑백갱스터영화처럼 강렬한 활동을 했던 필립 말로우와는 달리, 루 아처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조용하게 움직일 뿐이다. 어쩌면 이것은 로스 맥도날드의 작품 성향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실종과 붕괴된 가정을 다루었던 로스 맥도날드. 그 사건들 속에서 점점 실종되어간 것은 루 아처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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