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네놈이 지금 나를 약올리는 거로구나

추리무협소설 <천지> 287회

등록|2007.10.12 08:25 수정|2007.10.12 08:32
“헛! 제법인데. 괴물?”

말은 여전히 장난기 섞인 것이었지만 설중행이 흑교신의 예상 밖의 움직임에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의 공격을 아주 간단하게 피했을 뿐더러 흑교신의 손은 정확히 무릎 바로 위 혈해혈(血海穴)을 잡아왔던 것이다.

설중행은 공중에서 세 바퀴나 회전하며 흑교신의 간단한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흑교신이 성큼 걸음을 옮기며 설중행의 허리를 노리고 쌍수를 휘둘렀다. 시커먼 그의 손에 언뜻 반짝이는 손톱이 보였는데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자칫 한 번 살짝 할퀴기라도 한다면 살점이 뭉텅 파여 나갈 것 같았다. 흑교신의 움직임은 매우 단조롭고 간단해 보였지만 막상 상대하는 처지에서는 피하거나 막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피한다는 것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공격범위를 예상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고 또한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흑교신의 공격은 통상 예상했던 것보다 깊고 치명적이었다. 단조롭고 간단해 보이는 공격인데도 당황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더구나 예기치 못할 것이 흑교신의 몸이 그리 유연하지 않음에도 허리가 완전히 직각으로 꺾인다든지, 팔의 관절을 무시하고 뒤로 꺾이는 등 살아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찌이익

'아차'하는 순간에 설중행의 어깨부터 등 뒤로 옷이 길게 찢어져 나갔다. 언뜻 보이는 설중행의 맨살 위로 긴 상처가 보였는데 금방 그 주위가 시커멓게 변했다.

“빌어먹을…. 이 자식이?”

설중행이 몸을 뒤집으면서 다시 양발로 흑교신의 어깨를 타격해갔다. 헌데 웬일일까? 흑교신은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긴 팔을 이용해 설중행의 복부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설중행의 공격 정도는 몸으로 견디어 낼 수 있다는 태도였다.

하기야 풍철한의 검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았고, 선화의 소수인장에도 견딘 몸이니 설중행의 무상각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이었다. 이미 흑교신의 의도를 짐작한 설중행이 오히려 갑자기 공격부위를 바꾸어 어깨가 아닌 자신의 복부를 향해 파고드는 흑교신의 양 손을 차냈고, 잠시 흑교신의 팔이 옆으로 벌어지는 순간 그의 오른쪽 소매에서 빛살처럼 소도가 튀어나갔다.

파팟

그것은 흑교신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갔는데 아무도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고, 흑교신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지 무릎을 굽혀 몸을 재빨리 낮추었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심장이 아닌 어깨를 스친 것이 다행이었다.

“이놈!”

어깨에서 가는 핏줄기가 솟구치자 흑교신의 입에서 노갈이 터졌다. 여전히 울리고 쇠를 긁는 듯한 음성이었는데 화가 나자 탁음까지 섞여 나왔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설중행은 재차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몸을 뒤집어 회전하면서 흑교신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흑교신을 약 올리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흑교신이 마구잡이로 설중행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허나 설중행은 보법을 착실히 밟으며 흑교신의 공격을 피하면서 장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어이, 괴물! 술래잡기 하자니까. 밤새도록 나하고 생사림 안에서 놀아 보자고.”

설중행의 의도는 명백했다. 흑교신이란 이 괴물 하나만 자신이 처리해주면 자신의 몫은 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는 흑교신의 마구잡이 공격에 계속 뒤로 물러나면서 드디어는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흑교신이 바로 그의 뒤를 쫓았다.

‘알아서 하시오. 나는 이 놈 하나 가지고 놀 테니.’

설중행의 전음이었다. 풍철한은 그 전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함곡이 저들의 손에 붙잡힌 이상 함곡의 말대로 이제는 자신이 일행들을 추슬러야 했다. 또한 함곡의 말이 옳았다. 함곡을 잃는다는 것은 친구로서 절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함곡을 놓고 흥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태만 악화시킬 것이고, 그것은 원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터였다. 그래도 괴물 하나를 설중행이 나서서 처리해 주는 것이 다행이었다.

“자네 말대로 하지.”

풍철한은 함곡을 보며 말했다. 풍철한은 냉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잘 생각했네.”

“자네의 생사에 대해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겠네. 하지만 만약 자네가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나 역시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볼 수 없을 걸세.”

풍철한은 함곡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는지 함곡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대신 추산관 태감과 상만천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만약 함곡을 건든다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것이란 의미와 함께 이제부터 함곡이 말한 대로 술래잡기를 시작하자는 의미도 있었다.

“재미있겠군.”

대답은 추산관 태감의 입에서 나왔다. 지금껏 상만천이 하는 대로 지켜만 보아왔던 추태감이 왜 나선 것일까? 그것은 상만천이 뭐라 하기 전에 함곡의 제의를 승낙해 버린 것이어서 상만천마저도 무슨 의도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함곡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추태감이 이리 선선히 응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는데 순간 상만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뇌리로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풍철한이 막 떠올린 이름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매교신’

암향부동화 매교신을 믿고 그리하자는 것일 게다. 이미 매교신은 이곳에 나타난 인물들을 모두 알고 있는 터.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인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할 것이다.

허나 그 이름을 떠올리는 상만천과 용추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를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생사림 안에서 술래잡기가 벌어질 경우 자신들마저 그들이 노리는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풍철한은 신경질적으로 홱 고개를 돌려 자기 쪽 인물들을 쭉 바라보았다. 동의를 구하는 눈빛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풍철한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의미로 모두들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이제 시작해 봅시다.”

풍철한은 말과 함께 뒤로 쭉 물러났는데 그 순간 능효봉마저도 일행과 함께 나왔던 곳으로 빠르게 사라졌고, 귀산노인 쪽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풍철한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자 상만천이 추태감을 바라보았다.

어찌할 것인지 묻는 듯한 시선이었는데 거기에는 이 모든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었다. 허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가 감돌고 있음은 웬일일까?

“용추,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상만천의 의미 있는 시선을 가볍게 넘기며 물은 사람은 추산관 태감이었다. 이것 또한 노회한 추태감의 모습. 자신이 결정할 수 있음에도 일단 상대편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다만 자연스럽게 상만천이 아닌 용추에게 물은 것뿐이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