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지금은 '외로운 늑대'가 더 필요한 때다

[백병규의 미디어워치] 한국의 기자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록|2007.10.12 16:37 수정|2007.10.12 17:49

▲ 국정홍보처의 폐쇄조치로 기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들이 12일 외교통상부 청사 2층 로비에 모여 기사를 송고하고 있다. ⓒ 이병선

"기자는 한 마리 외로운 늑대와도 같아야 한다."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최일남 선생이 10년 전 한 말이다. 그러니까 1997년 2월, 어느 눈 내리는 날 당시 미디어 비평전문지 <미디어오늘>에서 신년 기획특집으로 잡은 ‘원로 언론인과의 대화’ 시리즈 때문에 최일남 선생을 만났을 때 들은 이 한마디에 전율했다.

한 마리 외로운 늑대…. 순간 참으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결코 구속되지 않는 야성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순간 최일남 선생이, 또 그 연배의 몇몇 원로 언론인들이 살아왔던 ‘외로웠을 여정’이 떠올랐다. ‘아, 이분들이 이렇게 여기까지 왔구나…’ 싶기도 했다. 그것은 두려움이자 막막함이기도 했다. 그분들은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지만, 아직 가야 할 여정이 많이 남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찌 갈 수 있을지 막막하고, 또 두려웠다.

10년이 지난, 오늘 불현듯 최일남 선생의 이 말 한마디가 다시 떠올랐다. 기자실에 대못질을 했다며 기자들이 ‘출근투쟁’과 ‘브리핑 거부투쟁’에 이어 본격적인 농성투쟁을 예고하고 있는 바로 이때 최일남 선생의 이 말이 떠오른 것은 왜 일까.

묻고 또 묻게 된다. 지금 기자들은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선진화 방안'이 정답은 아니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정부의 이른바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정부도 나름대로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무던히 애쓴 대목을 외면하는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부처 기자실을 통폐합하고, 통합 브리핑 센터로 재편한 것이 꼭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통합 브리핑 센터로 재편한다 해서 국민의 알권리에 재갈을 물리고, 부처 취재를 원천 봉쇄하는 조치라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기자들로서는 불편함이 따르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기자의 본업을 팽개치고 ‘취재거부’까지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언론탄압이라는 주장도 수긍하기 어렵다.

기자들의 집단행동을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얼마 만에 확인하게 되는 기자들의 ‘연대’이고, ‘집단행동’인가. 하지만, 그것이 왜 지금 이래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왜 ‘기자실’과 ‘브리핑룸’에 기자들이 이처럼 모든 것을 걸다시피 나서야 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 언론 자유를 위협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방해하는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언론의 자유와 관련해 물어야 할 것들은 지금도 수없이 많다.

기자들은 언론사 내적인 통제와 구속에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자본의 전방위적인 통제에서 언론과 기자들은 또 얼마나 자유로운가. 우리 사회 힘 있는 집단과 세력의 압력으로부터 기자들은 또 얼마나 자유로운가. 기자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는 ‘내부 검열’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는가.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 때, 또 버마 시위 때 한국의 언론과 기자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삼성 기사 때문에 <시사저널> 기자들이 1년여 동안 외로운 투쟁을 할 때 기자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삼성 X파일 사건 때, 황우석 사건 때 ‘언론자유’는 온전히 발휘되고 수호됐던가.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이때, 한국 언론과 기자들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유권자들의 바람직한 권리 행사를 위해 할 일을 다 하고 있는 것일까.

기자실이나 브리핑룸 문제가 결코 사소한 문제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문제로 ‘기자실 사태’를 호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통합 브리핑 센터로 옮기는 것이 그렇게도 취재에 있어 결정적인 걸림돌인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동안 기자실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던 인터넷 신문이나 ‘작은 언론’들은 어떻게 취재를 해왔다는 말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온전히 기자들의 몫이다.

한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빛나는 기사’들은 결코 브리핑과 기자실 체제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마리 ‘외로운 늑대’들이 그나마 한국 언론의 ‘빛나는 성취’를 기록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은 ‘외로운 늑대’들이 더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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