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TV 드라마에서 왕들이 부활하고, 그 중심에 정조가 있다는 지적은 자주 언급되었던 점이다. TV 브라운관은 아쉽게도 대중적 유행을 나중에 수습하여 반영하는 면을 지닌다. 그만큼 보수적인 속성이 있다. 정조를 개혁군주로 그리는 드라마가 많은 것은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MBC 드라마 ‘이산’, 케이블TV CGV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 ‘한성별곡-正’은 정조를 다룬 드라마인데 모두 개혁군주로서 정조를 형상화 하고 있다. 그리고 반개혁 세력에게 핍박을 당하는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대개 개혁 성향 때문에 암살당하는 것으로 연결시킨다. 뮤지컬 <정조대왕>,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도 마찬가지다. 역사평론서 <이산 정조대왕: 조선의 이노베이터>, 소설 <정조대왕 이산’ >도 개혁 군주를 표방하고 있다.
소설 장르에서 본격적으로 정조를 개혁군주로 그린 작품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다. <영원한 제국>은 정조를 개혁 군주로 본격 형상화 했을 뿐만 아니라 정조 독살설을 본격적으로 주장한 작품이다. 심하게 말하면 여타의 작품들이 이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현재 정조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해석은 너무나 획일적이다. 과연, 정조는 개혁을 추진한 사람으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정조는 이념보다는 실용주의를 표방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학파를 등용했다고 한다. 잘 알려져 있듯 화성을 짓고, 상업 부흥을 꾀했다. 분명 혁신과 개혁을 추진한 리더로 보인다. 하지만 정조는 철저하게 성리학적 질서를 꿈꾸었으며, 그가 일련의 작업을 통해 이루려한 국가도 성리학적 가치 질서가 완성된 나라였다.
문화 정치를 이룬 임금이라는 논거로 규장각 설치를 든다. 규장각의 현실적, 구체적 역할은 학문 연구와 서적의 발행이었는데, 정조는 주자학 서적의 간행과 보급을 최대 사업으로 간주했다. 당시 반주자학적인 양명학과 고증학이 중국 사상계를 휩쓸고 그러한 영향이 조선에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1786, 1787년 중국 서적을 수입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다양한 사상을 봉쇄하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인간의 욕망과 현실성, 경쾌하고 발랄하며 서정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초월적이고 근본적인 리(理)의 철학을 구현하려 했고, 그것에 해당하지 않은 기(氣)의 세계는 배제했다.
문체반정의 불벼락을 맞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당시에 발행 유통되지 못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백탑파와 정조를 대결구도로 그리는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 요컨대, 박지원이나 이덕무 등을 등용한 것은 리(理)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탕평의 방편이었을 뿐이다.
정조는 불교에 대해서 여전히 배척했고, 즉위 초 왕실의 원당 사찰 건립을 금지하고,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했다. 나중에 능침원찰 용주사를 140칸 규모로 지었던 것은 아버지의 아들로써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서였으니, 그것도 역시 유교 내지 성리학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조치다.
천주교를 인정한 임금으로 기억하지만 정조는 반드시 그러한 것만은 아니었다. 1791년 조상의 신주를 태운 이른바 ‘진산사건’이 터지자, 권상연과 윤지충을 죽이고, 천주교 서적을 압수해 불살랐다. 조상의 신주를 태운 것은 성리학적 가치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왕권이 미약해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생각해 왕권 강화를 위해서 갖가지 정책을 시도했다. 이가환, 홍대용, 채제공, 정약용 등 남인을 중용하고 이덕무, 박제가 등 벼슬길이 막혔던 서얼 출신도 등용시켰다.
탕평은 다른 의미로 다양한 세력을 끌여들여 견제와 균형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백성을 위한다는 상업 진흥과 노비추쇄법 폐지도 마찬가지다. 민본 정치 실현으로 살림살이를 키우고 왕권의 강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많이 알려졌듯이 실학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성리학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화성 축성도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인데, 상업 부흥책은 시장의 흐름이 아니라 과도한 군주의 명령에 의존하고 있었다.
개혁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한제국의 조치들이 개혁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성리학적 질서를 벗어나 동양과 서양의 접합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근대에서 근대를 향한 개혁이었지만, 정조에게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정조의 시대는 전근대의 화려한 마지막 불꽃이었는지 모른다.
정조의 변화노력이 성공했다면 조선이 근대국가를 이룩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개혁자였는지 의문스럽다면 이러한 기대감은 실망으로 돌아올 여지가 크다. 정조는 성리학적 질서를 회복하고자했다. 그런 면에서는 보수적이다.
여러 가지 획기적인 정책들은 강한 왕권이나 성리학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복고적 행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정조가 암살된 것은 수구파의 책동이라기보다 개혁파의 정조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이 주장도 하나의 가설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이 글의 요점은 정조에 대한 해석이 천편일률적이며, 드라마, 영화, 뮤지컬, 소설에서 마냥 같은 맥락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상과 문화예술에서 이렇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MBC 드라마 ‘이산’, 케이블TV CGV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 ‘한성별곡-正’은 정조를 다룬 드라마인데 모두 개혁군주로서 정조를 형상화 하고 있다. 그리고 반개혁 세력에게 핍박을 당하는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대개 개혁 성향 때문에 암살당하는 것으로 연결시킨다. 뮤지컬 <정조대왕>,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도 마찬가지다. 역사평론서 <이산 정조대왕: 조선의 이노베이터>, 소설 <정조대왕 이산’ >도 개혁 군주를 표방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현재 정조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해석은 너무나 획일적이다. 과연, 정조는 개혁을 추진한 사람으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정조는 이념보다는 실용주의를 표방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학파를 등용했다고 한다. 잘 알려져 있듯 화성을 짓고, 상업 부흥을 꾀했다. 분명 혁신과 개혁을 추진한 리더로 보인다. 하지만 정조는 철저하게 성리학적 질서를 꿈꾸었으며, 그가 일련의 작업을 통해 이루려한 국가도 성리학적 가치 질서가 완성된 나라였다.
문화 정치를 이룬 임금이라는 논거로 규장각 설치를 든다. 규장각의 현실적, 구체적 역할은 학문 연구와 서적의 발행이었는데, 정조는 주자학 서적의 간행과 보급을 최대 사업으로 간주했다. 당시 반주자학적인 양명학과 고증학이 중국 사상계를 휩쓸고 그러한 영향이 조선에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1786, 1787년 중국 서적을 수입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다양한 사상을 봉쇄하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인간의 욕망과 현실성, 경쾌하고 발랄하며 서정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초월적이고 근본적인 리(理)의 철학을 구현하려 했고, 그것에 해당하지 않은 기(氣)의 세계는 배제했다.
문체반정의 불벼락을 맞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당시에 발행 유통되지 못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백탑파와 정조를 대결구도로 그리는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 요컨대, 박지원이나 이덕무 등을 등용한 것은 리(理)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탕평의 방편이었을 뿐이다.
정조는 불교에 대해서 여전히 배척했고, 즉위 초 왕실의 원당 사찰 건립을 금지하고,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했다. 나중에 능침원찰 용주사를 140칸 규모로 지었던 것은 아버지의 아들로써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서였으니, 그것도 역시 유교 내지 성리학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조치다.
천주교를 인정한 임금으로 기억하지만 정조는 반드시 그러한 것만은 아니었다. 1791년 조상의 신주를 태운 이른바 ‘진산사건’이 터지자, 권상연과 윤지충을 죽이고, 천주교 서적을 압수해 불살랐다. 조상의 신주를 태운 것은 성리학적 가치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왕권이 미약해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생각해 왕권 강화를 위해서 갖가지 정책을 시도했다. 이가환, 홍대용, 채제공, 정약용 등 남인을 중용하고 이덕무, 박제가 등 벼슬길이 막혔던 서얼 출신도 등용시켰다.
탕평은 다른 의미로 다양한 세력을 끌여들여 견제와 균형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백성을 위한다는 상업 진흥과 노비추쇄법 폐지도 마찬가지다. 민본 정치 실현으로 살림살이를 키우고 왕권의 강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많이 알려졌듯이 실학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성리학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화성 축성도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인데, 상업 부흥책은 시장의 흐름이 아니라 과도한 군주의 명령에 의존하고 있었다.
개혁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한제국의 조치들이 개혁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성리학적 질서를 벗어나 동양과 서양의 접합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근대에서 근대를 향한 개혁이었지만, 정조에게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정조의 시대는 전근대의 화려한 마지막 불꽃이었는지 모른다.
정조의 변화노력이 성공했다면 조선이 근대국가를 이룩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개혁자였는지 의문스럽다면 이러한 기대감은 실망으로 돌아올 여지가 크다. 정조는 성리학적 질서를 회복하고자했다. 그런 면에서는 보수적이다.
여러 가지 획기적인 정책들은 강한 왕권이나 성리학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복고적 행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정조가 암살된 것은 수구파의 책동이라기보다 개혁파의 정조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이 주장도 하나의 가설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이 글의 요점은 정조에 대한 해석이 천편일률적이며, 드라마, 영화, 뮤지컬, 소설에서 마냥 같은 맥락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상과 문화예술에서 이렇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데일리안에도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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