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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보다는 낫다

처음으로 남동생의 여자 친구를 소개받던 날

등록|2007.10.17 14:42 수정|2007.10.17 16:50

▲ 올해 추석 때 제부와 엄마 아빠, 독립해서 나간 남동생이 처음으로 명절에 왔다 갔다. ⓒ 배지영



그 때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1998년 여름, 새벽이었다. 꿈에 남동생 창석이가 나타났다. 그 애는 스물셋,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 중이었고, 밤에는 유흥업소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끔 그 애를 보며, 차라리 데모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때였다.

"누나, 돈 좀 줘."

꿈이라고는 하지만 창석이가 나한테 돈 달라고 하는 게 이상했다. 그 애한테 용돈을 줘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공부를 하도 못해서 제 때에 졸업도 못하고 학교를 오래 다녔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만 받아쓰다가 졸업을 앞두고는 혼인했다.

"어?"
"누나, 나 돈 좀 주라니까."

왜 그런지, 나는 현관에 서 있는 그 애를 선뜻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반쯤 젖혀진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었다. 그 때 진짜로 우리 집 전화벨이 울렸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기분이 신비롭지 않았다. 여전히 문 밖에 서 있는 동생에게 말했다.

"배창석, 기다려! 누나, 전화 받고 올 테니까 가지 말고, 기다려!"

전화를 받는 순간, 꿈으로 돌아가서 신체 건강한 그 애를 현실로 데려올 수는 없었다. 전화선을 타고 온 언니 목소리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꼈다. 창석이가 병원 중환자실에 실려 왔는데 의식은 없고 얼굴은 으깨어져서 알아볼 수 없다고 했다.

창석이는 살려고 나한테 온 모양이었다. 그 애한테 용돈을 주고, 옷을 사 주던, 엄마나 언니한테 갔다면, 그 돈은 북망산으로 가는 노잣돈이 되었을 거다. 꿈이었지만, 우리 집 현관에 서 있던 애를, 거실로 데리고 들어왔으면, 최소한 의식은 잃지 않았을 것 같았다.

▲ 어릴 때 우리 4남매. ⓒ 배지영


그 해 여름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되었다. 계절이 바뀌고, 그 애가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에야 우리는 제대로 슬프고 화가 났다. 술 마신 그 애가 친구를 데려다주고 오겠다는데도, 오토바이 열쇠를 건네 준,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자체만으로, 남동생한테 평생 받을 효도를 다 받은 엄마는 의연했지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애는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얼굴뼈도 주저앉아서 몇 번이나 수술을 했다. 그 애 방 인형은 모두 다리에 붕대를 감고, 한 쪽 눈은 빨간 약을 바른 채 안대를 하고 있었다. 창석이는 사람들과 부딪히기 싫어했고, 학교에도 복학하지 않았다.

남동생은 겉모습에서 사고의 흔적을 지워냈을 때에 서울로 가서 독립했다. 어쩌다 하는 전화 통화로는 그 애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었다. 올 여름, 5년만에, 누나들이 보고 싶다고 찾아온 남동생을 만났다. 그 애 일터가 끝나는 시간은 새벽, 아침 해가 뜨면 생기를 잃는다. 더구나 운전해서 왔으니 더 피로했을 터였다. 자고 싶다고 커피를 달라고 했다.

남동생은 커피를 마시고 나서 잠이 들었다. 얼마 전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3년 동안 모은 적금으로 원하던 자동차를 샀다. 고3 때는 입시 공부를 잘 하고 싶다고 침대를 사 달라고 했다. 물론, 그 애는 새로 바꾼 침대 위에서 잠을 잤고, 대학에도 들어갔다. 바라던 대로 이루며 살던 애였다.

사고 뒤, 장애물 달리기를 하듯 살아왔을 창석이에게 유머가 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모여 한 공간에서 웃고 떠들다가 잠이 들었다. 어릴 때, 우리 방으로 스며들던 달빛의 감촉도 떠올랐다. 그 애의 아픔을 속속들이 알 수 없어서 괴롭고 미안하고, 죄책감까지 들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며칠 전에 창석이는 여자 친구를 보여주고 싶다는 '통보'를 해 왔다. 남동생이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대견했다. 나와 동생 지현이는 전화 통화를 하다가도, 좋아하는 가수 공연에 갔을 때처럼 꺅! 꺅!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처남이 여자 친구를 데려온다고 하니까 뭐하는 사람이냐부터 물었다. 나는 단호했다.

(째려보며) "킬러만 아니면 돼."

창석이가 오기로 한 날, 지현이네 부부는 대청소를 두 번 했다. 친정 부모님들은 신경이 곤두서서 그 애들이 왔느냐고 자꾸 전화를 걸어오셨다. 손에 땀이 나는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 같았지만 뭔가 자신감이 없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지현이가 "창석이 여친"이라고 말하는 게 거슬렸다.

"배지현, 네가 아무리 내 동생이라고 해도, 너는 좀 싸가지가 없는 편이야."
"뭐?"
"여친이 뭐냐? 여친 님, 여친 사마. 그렇게 불러."

▲ 남동생과 '여친 사마' ⓒ 배지영



마침내 남동생과 '여친 사마'가 왔다. 그 이는 얼굴도 곱고, 다리도 예쁘고, 키도 크고, 잘 웃고, 목소리는 가냘프지 않고, 말수도 알맞았다. 언제나 내 동생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얼굴에 큰 사마귀 같은 게 나 있더라도, 절대 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우리는 어른들이 하던 대로, 부모님 뭐하시냐? 몇 살이냐? 학교 어디 나왔냐? 무슨 일 하냐?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어처구니없는 '피'에 대한 고해 성사를 했다. 아무리 새 길이 자꾸 뚫린다지만 처가 가는 길을 헷갈려하는 아빠, 그 더듬이가 없는 곤충 같은 성질은 고스란히 지현과 창석에게로 갔다. 지현이는 혼자서 친정집도 갈 줄 모른다.

창석이는 고속도로에, 톨게이트에 '여친 사마'를 환영하는 현수막을 걸어놓지 않았다며 누나들의 소홀한 준비를 지적해 주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면, 영화제처럼 빨간 카페트도 깔아놓고, 군사정권 대통령이 시찰할 때처럼, 남동생과 '여친 사마'가 지날 길은 새로 닦자는 각오는 있었다. 그러나 진짜로 이루어질지는 몰랐다.

우리는 함께 밥 먹을 때도, 은파 물빛다리를 건널 때도, 집에 와서 차를 마실 때에도, '여친 사마'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는지, 그 이는 오히려 창석이한테 귓속말로 왜 아무 것도 묻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이의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라는 소중한 사실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창석이는 다시 어릴 때처럼 빛나 보였다. 여자 친구와 둘이 나란히 걷고, 맛있는 음식을 두고 서로 권하는 모습 자체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내 동생의 겉모습이나 직업 말고도, 다른 뭔가를 '알아봐 준' 그 이의 안목에도 감격했다.

그 애들이 돌아가고, 지현과 나는 둘이서 손을 잡고 밤길을 걸었다. 나는 좋으면서, 불안하고, 화가 나고, 미안하고, 혹시 헤어져서 상처 받으면 어쩌나, 쓸모없는 걱정을 했다. 생에 한 번씩,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술 먹은 창석이가 오토바이를 타기 직전의 시간으로 가고 싶었다.

▲ 올 봄, 아빠 생신날에 엄마가 좋아하는 횟집에 갔다. 남동생이 왔을 때도 저 집에 갔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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