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장고끝 폭탄선언 "자리에서 내려오라"

[태종 이방원 180] 세자를 폐하기로 결정한 임금

등록|2007.10.22 07:29 수정|2007.10.22 10:21

주청하는 신하들임금에게 상서를 올리고 주청하는 신하들. 사진은 특정사실과 무관한 재연 사진입니다. ⓒ 이정근


빈객 조용(趙庸)이 서연에 나아가서 강(講)하기를 청하자 양녕이 발에 종기가 났다고 사양하였다. 굳이 청하니 또 사양하였다. 다시 청했다.

“비록 편찮으시더라도 잠깐 서연청(書筵廳)에 나와서 저희들의 말을 들으소서.”

조용과 탁신 등 서연관과 대간이 공동으로 청했으나 나오지 않았다.

“저희들에게 전하의 교지가 있으니 편복차림으로 서연청에 나오소서.”

개성에서 하달된 상교(上敎)를 가지고 고(告)했으나 끝내 양녕은 나오지 않았다. 서연관들의 독촉성 간청이 이어지자 양녕은 세자전 내관(內官) 김순을 내보냈다.

“세자께서 복통으로 청강(聽講)하지 못합니다.”

종기에서 복통으로 옮겨갔다. 누가 보아도 참이 아닌 거짓이다. 일부러 드러낸 것이다. 칭병은 구실이니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뜻이다.

“소신이 빈객의 자리에 있은 지 이미 여러 해인데도 보도(補導)한 공효가 없으니 통분하고 통분합니다. 청컨대 잠깐 나와서 상교를 들으소서. 만약 저희들을 상접하지 않겠다면 저하(邸下)의 뉘우치는 마음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니 성상의 뜻을 움직일까 두렵습니다.”

'눈물을 거두어라, 면피용 눈물이 가소롭다'

조용(趙庸)이 눈물을 흘리며 진달했다. 허나 양녕의 가슴에는 감동으로 와 닿지 않았다. 개성에 부는 바람. 부왕의 마음. 유도(留都)한 대소신료들의 처신 모두 다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서연을 종용하는 서연관들 역시 세자의 장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직임을 다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요식행위라 단정하고 있었다.

‘가소롭구나. 너희들이 진정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드냐? 너희들이 흘리는 눈물은 세자를 위한 눈물이 아니라 너희들 자신을 위한 눈물이다. 자신의 목이 달아날까봐 흘리는 면피용 눈물이다. 가소롭다.’

“편찮으시다고 서연을 사양하고 약을 들지 않는다면 마음의 병이 있는가 합니다.”
“주상에게 죄를 지었으니 감히 어찌 마음이 평안하겠느냐?”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약은 의원도 할 수 없는 것이니 이미 지나간 것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하여 새 사람이 되어 성상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데 충효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몸이 편찮아서 접견할 수가 없다.”

양녕은 끝내 서연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자전의 대변인에 해당하는 윤덕인이 서연관들에게 전했다.

“저하가 전(殿)에 돌아온 이래로 수라를 드시지 않으시고 지게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니 병을 이룰까 두렵습니다.”

4개월 장고 끝에 터진 폭탄선언

태종 18년 여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유월 초이틀.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한상경, 옥천부원군 유창, 청성부원군 정탁과 육조, 삼군, 대간이 경덕궁에 입궐하여 조계청(朝啓廳)에 도열했다.

“세자 이제(李禔)가 간신의 말을 듣고 함부로 여색(女色)에 혹란(惑亂)하여 불의를 자행하였다. 후일에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력을 마음대로 한다면 형세를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여러 재상들은 이를 자세히 살펴서 나라에서 바르게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의정부·육조·삼공신·삼군 도총제부·문무 대소 각사(各司) 신료들이 상언하였다.

“신자(臣子)의 직분은 충효에 있고 충효가 궐(闕)하면 사람이 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세자이겠습니까? 지난번에 세자가 역신 구종수와 사통하여 불의를 자행하였을 때 즉시 폐하여 추방하는 것이 합당한데 전하께서 적장(嫡長)이라 하여 차마 폐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는 깊이 스스로 각책(刻責)하여 종묘의 중책을 이어받고 군부(君父)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이나 세자는 허물을 뉘우치고 자신(自新)하려는 뜻이 없고 도리어 원망하고 노여운 마음을 일으켜 오만하게 상서하여 그 사연이 패만(悖慢)하고 조금도 신자(臣子)의 뜻이 없었으니 신 등이 놀라고 두려워하고 전율(戰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상서합니다.

죄가 하늘을 속이고 종묘(宗廟)를 속이고 임금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는 데 이르렀으니 그가 종사(宗社)를 이어받아 제사를 주장할 수 없음은 더욱 분명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태조의 초창(草創)한 어려움을 생각하고 종사만세의 대계를 생각하여 대소신료의 소망을 굽어 따르시어 대의로써 결단하여 세자를 폐하여 외방으로 내치도록 허락하시면 공도(公道)에 다행하겠으며 종사에 다행하겠습니다.”-<태종실록>

“백관들의 소장을 읽어 보니 내가 몸이 송연(竦然)하였다. 이것은 천명이 이미 떠나가 버린 것이므로 이에 이를 따르겠다.”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한상경, 옥천부원군 유창, 청성부원군 정탁, 한평군 조연, 평성군 조견, 장천군 이종무, 곡산군 연사종, 동지돈녕부사 이담, 지돈녕부사 김구덕, 대제학 변계량, 병조판서 박신, 형조판서 박습, 이조판서 이원, 공조판서 심온, 병조참판 이춘생, 호조참판 이발, 예조참판 신상, 공조참판 이적, 찬성 최이, 참찬 김점, 부윤 이원항, 부윤 민계생, 판좌군도총제부사 이화영, 도총제 박자청과 이징, 총제 권희달·유은지·최윤덕·최운·문계종·홍부·홍섭·이배·김귀보·문효종·윤유충, 사간 정상, 집의 허규 등이 조계청(朝啓廳)에 모여 머리를 조아렸다.

“세자 이제를 폐하라.”

역사를 가르는 명이 떨어졌다. 수많은 신하들이 부복한 조계청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어명은 돌이킬 수 없다. 임금의 말이 곧 법이다. 누구하나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경덕궁의 적송도 떨었고 조선팔도의 산천초목도 떨었다.

태종은 이 말을 하기 위하여 도성을 비워두고 개성에서 4개월을 보냈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아버지로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허나 태종은 아비보다도 군왕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태종에게도 고통의 기간이었지만 양녕에게는 고문의 시간이었다. 이제 그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꺼낼 비장의 카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폐(廢)하였다. 무릇 사람이 허물을 고치기는 어려우니 옛 사람으로서 능히 허물을 고친 자는 오로지 태갑(太甲)뿐이었다. 내 아들이 어찌 태갑과 같겠는가?

나라의 근본은 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정하지 않는다면 인심이 흉흉(洶洶)할 것이다. 옛날에는 유복자를 세워 선왕의 유업을 이어 받게 하였다, 또 적실(敵室)의 장자(長子)를 세우는 것은 고금의 변함없는 법식이다.

장자가 유고하면 그 동생을 세워 후사로 삼아야 하나 제(禔)는 두 아들이 있다. 장자(長子)는 나이가 다섯 살이고 차자(次子)는 나이가 세 살이다. 나는 제(禔)의 아들로써 왕업을 대신하고자 한다. 왕세손(王世孫)이라 칭할 것인지 왕태손(王太孫)이라 칭해야하는지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의논해서 아뢰어라.”

이것이 정치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비슷하다. 표리부동이라는 유전자가 건강하게 이어지고 있다. 후사를 이어 갈 세자를 정하여 놓지 않고 현 세자를 폐할 수 있단 말인가.

양녕을 폐하기로 결심하고 한양을 떠날 때 이미 태종은 대위(代立)할 왕자를 마음에 정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양녕이 폐위되는 순간 양녕의 장자와 차자를 거론하고 있다. 충녕을 염두에 두고 세자를 폐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위한 수순이다. 충녕 카드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충녕은 감추어 둔 왕자다. 결정적인 순간에 극적으로 꺼내 들 비장의 카드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