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파리영덕 대탄리 수심 15m. 독성을 가지고 있고 어장을 망친다고 어부들에게도 지청구를 받지만 수중사진에선 좋은 주제가 되어준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음식점의 해파리 냉채의 재료가 바로 이 해파리다. ⓒ 장호준
민물
바다 앞에 섰을 때 사람은 작아진다. 다이빙을 배우고 나서도 물은 반갑고도 무서운 존재였다. 그래도 물속은 늘 궁금했다. 그렇게 바다 다이빙을 다니다 보니 '민물'이 몹시 궁금했다. 더구나 이젠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 무엇인가 확인해 볼 수가 있다는 생각이 마음을 더욱 급하게 했다. 이는 내가 바닷가가 아닌 내륙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민물이 만약 바다와 같은 환경을 제공한다면 매일 물속에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도 가까운 저수지에 얼마든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내 속마음을 참지 못하고 지금은 가고 없는 다이빙 사부에게 민물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물은 시야가 안 나옵니데이….”
시야가 안 나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 줄이야 알았지만 그래도 그 말은 아직 나에겐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었다.
산과 들에 널린 호수와 계곡들이 우리를 한없이 유혹했다. 민물을 애용할 수 있다면 좀 더 가깝게, 좀 더 편하게, 좀 더 헐값에, 다이빙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계산도 있었다. 그런데 시야가 나오지 않는단다. 보이지 않는데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남의 말을 좀처럼 믿지 않는 것이 초보자의 특징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산과 바다를 번갈아 헤매기 시작했다. 강원도 일대의 계곡, 양양, 속초, 동강, 어린천, 합천댐, 안동댐, 덕동댐, 낙동강, 섬진강, 단양, 농월정 밑의 웅덩이까지… 아마도 그때는 하수구라도 물만 많이 있었다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 메기거창. 잘 때는 특이하게 동굴의 천정에 붙어서 잔다. 야행성이다. 수염이 고양이 같아서 영어로는 캣피쉬(catfish)다. ⓒ 장호준
“형님, 형산강에 겨울 얼음 밑에 드러가마 잉어가 이따만한 게 버글버글 안 하능교, 포대기 가주가가 주서 다머마 안 되능교, 수온이 나자지마 고기가 활동을 안 하구마. 푸하하.”
그는 날짜와 시간까지 들어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나이는 나보다 아래였지만 다이빙 경력은 찬란한 후배였다. 그러나 분하게도 나는 그의 말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토록 민물을 찾게 된 이유 중에는 어민들과 마찰의 영향도 있었다. 물에 들어가기도 전에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은 다이빙을 치우고 싶을 만큼 싫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댐은 부지런히 다녔지만 우리가 본 것은 별로 없었다. 댐의 물은 그야말로 시야가 제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심심유곡의 맑은 물은 예외였지만 그런 물은 물 밖에서 봐도 물속이 다 보이는 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원도 첩첩 산골에 탱크를 들고 가서 한 통의 필름을 쓰고 물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산골에 다이버가 왔다는 것은 산골 사람들에겐 엿장수가 온 만큼 신나는 일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동네 사람들이 계곡의 웅덩이 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물었다.
“선생님! 뭔가 좀 있습니까?”
바닷가 어촌을 다니면서 도둑놈 소리만 듣던 시기여서 '선생님'이라는 말에 내가 감격했음은 물론이다.
수중 문화
합천댐의 수몰 지구를 다이빙하며 우리는 동화 속의 나라를 꿈꾸었지만 시야가 없어 카메라는 아예 들이대지도 못했다. 한 무더기의 돌담길을 만난 것이 유일한 수확이었다.
다이빙 초보 시절, 나는 어류도감을 노상 가지고 다녔다. 왜냐하면 보는 것마다 “이 물고기는, 이 해초는, 이름이 뭔데요?” 라며 바쁜 사람들 턱밑에 들이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지방마다 같은 물고기도 이름이 다 달랐다.
도시의 큰 서점을 뒤지고 다녔지만 내가 만질 수 있는 우리나라의 물고기 도감이나 해양 서적은 빈약했다. 물고기는 대개 죽은 것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중에서는 어물전에 있는 것을 찍었는지 조금 상한 것도 보였다.
비난이 아니다. 그 도감을 만들었을 시기에는 심해의 물고기는 고사하고, 연안의 물고기도, 살아 있는 모습을 사진 찍을 수 있는 장비도 돈도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컴퓨터 이미지 프로그램의 도움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악전고투 끝에 출판을 했다는 것은 존경을 받을 일이었다.
민간인들의 다이빙이 시작되고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들 중에 도감의 출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하여 한 권 두 권 도감들이 만들어졌다.
▲ 군소큰놈은 제법 팔뚝만한 것도 있다. 식용으로 쓰이며 교미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해조류 먹고산다. 수심 5m 조류에 모자반이 옆으로 누워있다. ⓒ 장호준
서귀포항의 한 낡은 건물 이층에서 다이빙 숍을 하던 사람이 문 섬의 바다 속을 죽어라고 찍어 '제주의 수중세계'란 비디오물을 만들고 공중파를 통해 사람들에게 소개한 것도 이 시기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 사진전은 1985년에 대구에 사는 한 다이버가 열었다. 그는 다이빙과 수중사진에 대단한 열정을 가진 재력가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자 여기저기 수중사진을 찍는 동아리들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수중 사진전을 열어 사람들에게 바다 속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다이빙 전문 잡지가 태어나고 다이빙 장비를 생산하는 업체도 생겼다. 여기저기서 수중 문화가 꽃망울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이빙에 관련된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이제 겨우 수중카메라가 우리나라의 일부 다이버들에게 퍼져가던 시기였으니까. 이런 업체들의 노력으로 겨우 카메라의 매뉴얼에 대한 번역물이 프린트로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다이버들끼리 열심히 찍어보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는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그때의 학습방법이었다.(1984년에 수중카메라의 혁명이랄 수 있는 Nikonos v가 나왔다) 이 시기에 수중사진 촬영대회도 시작됐다. 쓰레기통엔 폐기처분한 필름들이 넘쳐났다.
“첨엔 물속에서 발브 팍팍 안 터잤심니꺼, 그래가 우짜든동 흐리하게라도 사람 모습만 나오면 조타꼬 지랄했응께, 지금 생각하믄 코메딥니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수중사진기를 들었던 이의 고백이다.
물속이란 카메라에게 가혹한 환경이다. 그러나 이젠 기술이 발달하여 전자동 디카가 물속까지 들어왔다. 제대로 모습만 나오는 사진 한 장을 건져도 희희낙락하던 시절에 비하면 카메라의 왕초짜도 들어가면 그런대로 볼만한 사진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뭔가 억울한 세월을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하지만 그 시절은 그 시절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민간다이빙의 태동기랄 수 있는 70년대에는 잠수의학에 대한 지식은 고사하고 다이빙 매뉴얼도 변변한 게 없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다이빙 교육도 없이 친구가 놀러 가는 데 따라갔다가 골수 다이버가 된 경우도 있었다.
그는 다이버 중 한 명이 배가 아파 다이빙을 들어가지 못해 장비가 남자, 친구가 “고마 니가 대신 저 장비 갖고 따라 들어가자” 해서 얼떨결에 들어간 경우였다. “숨만 쉬다 안 나왔심니꺼. 물도 얼매나 뭇던지…” 그가 웃으며 한 말이다.
다이빙 사고 중에 아주 위험 것이 있다. 감압병이다. 오랜 잠수 후 갑자기 상승하면 외부압력이 급격히 낮아지므로 몸 속의 질소가 과포화된 상태가 되어 인체 조직이나 혈액 속에서 기포가 발생하여 감압병이 발생한다. 결과는 엄청나서 발생부위에 따라 반신불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상승속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이야 기본 장비 중의 하나이지만 BC(부력조절과 탱크를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조끼)가 처음 나오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며 사부가 들려준 말이다. BC라는 장비가 있기 이전에는 자신의 다리 힘에 의존해 오리발을 차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게 전부였다.
“그거 첨 입응께 조은기라요. 오리발을 열씨미 안 차도 밑에서 공기 가뜩 너어노으마 올라오민서, 압력이 나자지니까, 공기가 부풀지요, 그러면 속도가 붙터서 물 위로 뽕뽕 튀어 오르는기라요. 그걸 재미있다고 들어갈 때마다 했응께로, 디지는 줄도 모리고….”
물론 그렇게 한다고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감압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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