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의 즐거움 대신 차라리 슬픔을 느꼈다
[오대산의 암자들 ②]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 적멸보궁 가는 길에. ⓒ 안병기
▲ 적멸보궁. ⓒ 안병기
적멸보궁은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지금 바라보는 이 전각은 최근에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불상을 모시는 좌대엔 붉은 방석인 좌복만이 덜렁 올려져 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으니 그 이상의 고귀한 불상이 어디 있겠는가. 일연의 <삼국유사>와 민지의 '오대불궁산중명당' 사이의 괴리
▲ 보궁 뒤에 자리한 사리탑비. ⓒ 안병기
▲ 한 참배객이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다. ⓒ 안병기
다시 몇 리를 내려와 시내를 따라가니 폭포와 맑은 못에 볼 만한 곳이 많았다. 소명묘를 지나 중대에 오르니, 산이 험하고 길이 희미해 있는 힘을 다해 다릴 잡고 오름에 기진맥진하여 땀이 온몸을 적셨다. 열 걸음에 한번 쉬고 하면서 중대에 오르니, 바람이 거세게 불어 자세히 구경할 수 없었고, 법당에 큰 글씨로 적멸보궁 넉 자가 씌어 있었는데 바로 개성부 사람 홍명기가 아홉 살 때 쓴 것이었다. 홍명기는 현재 나이 스물아홉 살로 개성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암자 건물은 채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려 넣어 다른 절들과는 달랐고, 인물과 새, 짐승, 초목 등의 형상을 사방 벽과 천정에 그려놓아 공교하기 그지없었으니, 바로 색름 수좌가 중창한 것이다. 색름은 성정의 제자이고 의규는 성름의 제자라 하였다. 암자 뒤에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았는데 바로 석가불이 두개골을 안치한 곳이라 하였다. 암자는 터가 반듯하고 산세가 옹호하고 있었으나 혈이 풍후하지 못하고 안산이 자못 멀었다. - 정시한 (1625 ~ 1707)의 <산중일기> 중 1687년 10월 11일치 노구를 이끌고 숨을 할딱이며 산을 오르는 정시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시한보다 조금 뒤 세상에 나온 윤선거(1610~69)라는 사람의 시문집에도 적멸보궁에 대해 쓴 기문이 있다. 거기에 "내불치금상 지설불영 난삽잡색지화이기((內不置金像只設佛影 亂揷雜色紙花而已)"라 썼다. 이로 미루어 당시 적멸보궁 불단 위에는 불화와 각색의 종이꽃이 어지럽게 장식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적멸보궁엔 적멸이 깃들 자리가 없었다
▲ 적멸보궁 마당에 걸린 등들. ⓒ 안병기
▲ 적멸보궁 참배를 끝낸 후 내려가는 스님. ⓒ 안병기
오대산 중대에 이르러서도 보지 못한 적멸보궁을
여기 와서 본다
위도 아래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삐걱대는 맨 뼈다귀에 바람소리나 들이고 있는 저
적멸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저 소리의 고요한 일가친척들
세상에 남루만큼 따뜻한 이웃 다시 없어라
몰골이 말이 아닌 두 탑신(塔身)이
낮이나 밤이나 대종천 물소리에 귀를 씻는데
텅 빈 물상좌대 위,
저 가득가득 옮겨앉는
햇빛부처, 바람부처, 빗물부처
오체투지로 기어오르는 갈대잎 덤불
밤 내린 장항리,
폐사지 자욱한 달빛 진신사리여! - 김명리 시 '적멸의 즐거움' 전문
시인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적멸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나 보다.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폐사지에 가서야 비로소 적멸의 즐거움을 맛보았다니 말이다. 적멸보궁에서 내려온 젊은 승려와 나란히 가면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눴다. 그 스님은 지금 만행 중이라 했다.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거쳐서 여기에 왔다는 그는 저 오대산 적멸보궁을 참배하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통도사에 있다는 스님과 중대 사자암에서 작별했다. 내게 "통도사도 다녀가세요"라고 인사한다. 그와 헤어지고 나자, 마음속으로 짧은 적막이 기어든다. 도대체 이런 적막을 몇천 번이나 겪어야 적멸에 이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오대산 적멸보궁은 지난 17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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