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목대에서 내려다 본 전주 한옥마을. ⓒ 이종민
그곳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천 년이 넘는 ‘완전의 땅’ 전주의 역사와 기운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전주 한옥마을. 그곳에서는 다시 천 년의 전통으로 이어질 문화와 예술이 매우 느리게 무르익고 있다. 몸과 마음의 걸음이 바빠서는 그 오묘한 정취를 놓치기 십상이다. 낮은 하늘 선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주는 여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만 그곳에 녹아있는 기개의 역사와 기품 있는 문화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평온해 보이는 이 기와집 마을, 이곳의 형성과정에서도 전주인들의 기개를 확인할 수 있다. 옛 전주부성 남동쪽에 자리한 이곳은 20세기 초 성내를 점유해오는 일본인들의 ‘꼴’이 보기 싫어 성 밖 가까운 곳에 ‘우리들만의 터’를 잡는다고 기와집을 지으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6, 7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모여 살았으니 전주의 문화 예술은 이곳을 중심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전주 한옥마을 전경중앙에 보이는 것이 중앙초등학교. 그 옆 나무숲 뒤쪽으로 경기전이 있다. ⓒ 이종민
이곳이라고 풍운의 역사가 없었을까?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보기 좋다!”는 말 한마디에 영광의(?) 개발금지구역이 된 이곳은 산업화 과정에서 새로운 주거문화에 밀려 졸지에 ‘전주에서 민원이 가장 많은’ 슬럼가로 전락하고 만다. 그 덕에 ‘새마을운동’ 식의 서구화 파고를 피해갈 수 있었고 다시 그 덕으로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통문화마을로 거듭날 수 있었으니, 이 짧은 기간에 겪은 숱한 역사의 반전, 그 아이러니의 묘미를 생각하면 ‘천천히!’는 당연한 화두였을 것이다.
▲ 전주천변 억새쉬리가 헤엄치고 있는 세계적 도시생태 하천. 그 옆으로 억새가 하얗게 피어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 이종민
이곳을 둘러싼 예사롭지 않은 품새도 여유와 기품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 마을 남쪽으로는 이 지역의 중요한 젖줄 전주천이 흐른다. 지금은 쉬리가 살 정도로 깨끗한 도심 생태하천으로 거듭나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지만 동학농민혁명 등 이 고장을 중심으로 진행된 숱한 역사적 사건을 지켜본 입 무거운 증인이기도 하다.
▲ 오목대이성계가 잔치를 벌였음직한 곳에 오목대라는 누각을 세웠는데 그 현판은 석전 황욱선생이 쓴 것이다. 한옥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는 고종 친필의 비가 서 있으며 최근 멋스러운 산책로가 조성되어 연인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 이종민
그 동편에는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람의 언덕’이 있다. 한때 청소년들 ‘비행’의 우범지역이기도 했던 이곳에도 이성계와 정몽주, 이완용과 전동성당에 관련된 역사가 묻혀있다. 전주 이씨가 발흥했다는 발이산(發李山) 끝자락인 이 동산은 그 기운을 차단하고 싶은 일제에 의해 전라선 철도의 명분으로 댕강, 본류와 끊기는 설움을 겪기도 했다. 오동나무가 있어 오목대(梧木臺)라 불리는 이곳은 오얏나무가 있었다는 이목대(李木臺)와 남원행 도로에 차단되어 서로 다른 바람을 맞고 있다.
▲ 오목대 비각'태조황제유허비'를 모신 비각 앞에 임옥상 화백, 김사인 시인, 건축가 승효상 등 '문화우리'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위해 서있다. ⓒ 이종민
그 뒤가 중바위(僧岩山). 그 깊고 너른 골짜기에는 ‘문화강국’을 꿈꾸었던 후백제 견훤의 한이 서려 있다. 그 빗겨 너머에 세계 유일의 동정부부 순교자를 모신 치명자 성당이 있고 그 서쪽 사면에 전주를 동쪽에서 굳게 지켜주는 동고사(東固寺)가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에 전주팔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淸煙)을 자랑하는 한벽루가 있다.
▲ 전주 향교의 명륜당평지에 있기 때문에 대성전 뒤에 위치한 명륜당, 대성전보다 크지 않게 하기 위해 전면 3칸으로 했지만 활용도를 고려하여 옆으로 달아낸 모습이 이채롭다. 한옥의 확장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어린이들의 한문공부 교실로 활용되고 있는 이 명륜당 앞에 정희성, 민영, 천양희, 박남준 시인 등 작가회의 회원들이 앉아 있다. ⓒ 이종민
그 곁에는 지금도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릴 듯한 전주향교가 교육입국의 꿈을 북돋아주려는 듯 단아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으로 찾는 이들을 반긴다. 특히 이곳에는 대성전, 명륜당 말고 성인들의 아버지를 모신 계성전(啓聖殿)이 있어 다른 향교와는 사뭇 다른 규모와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 경기전태조어진을 모시고 있는 경기전 정자각.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 경기전에는 많은 귀중 유물들이 예산을 핑계로 방치되어 있다. ⓒ 이종민
▲ 전주사고조선 전반부의 역사를 지켜낸 전주사고의 모습이 노란 은행잎 뒤로 보인다. ⓒ 이종민
한옥마을 서쪽은 옛 전주부성자리로 이어진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은 그 의젓하고 웅장한 기품에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되는 곳이다. 그 곁에는 숱한 병화 속에서 역사를 지켜낸 전주인들의 기개를 확인할 수 있는 전주사고가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본마저 불타버렸다면 조선전기의 방대한 역사는 암흑 속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 전동성당경기전에서 바라 본 전동성당. 한옥 담장과 서양 건축양식이 근사한 '퓨전'을 자아내고 있다. ⓒ 이종민
동양문화를 상징하는 경기전 맞은편에는 서양문화를 대변해주는 전동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포근하면서도 화려한,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풍이 가미된 이 건물은 치명(致命)의 숭고함을 웅변하면서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 전동성당내부동정부부 등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당한 곳에 세워진 전동성당. 지금은 수리중이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없지만 조만간 치명의 숭고한 뜻을 탁월한 건축예술로 승화시킨 장한 모습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 이종민
이처럼 풍성한 역사로 둘러싸여 있는 전주 한옥마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민속촌과 같은 박제의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터전이라는 점이다. 골목골목마다 애환의 한숨과 웃음소리가 낮은 돌담 넘어 가득하다. 그 중간 중간에 우리 전통문화를 갈고 닦는 장인들의 땀 냄새가 배어있다.
명창 부부가 명창 아들과 더불어 소리공부에 여념이 없는 소리청이 있고 천 년 한지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뚝심과 이를 공예로 꽃피우기 위해 손 닳는 줄 모르는 열정이 있어 찾는 이의 넋과 시간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다.
▲ 온고을 소리청김일구, 김영자 명창이 살고 있는 '온고을 소리청'은 텔레비전 드라마 <단팥빵>의 촬영장으로도 유명하다. 정동채 전 장관, 김완주 전 시장, 이광철 의원 등이 <단팥빵> 출연진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종민
나무냄새 벗 삼아 목각에 여념이 없는 이도 있고 차의 향취에 취해 거의 신도가 되어버린 이도 이 정겨운 한옥마을에는 하나 둘이 아니다. 시간을 저당 잡히지 않고는 도저히 이곳의 정취를 그 겉치레나마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전통문화에 취한 몸을 구들 따스한 한옥에 뉘일 일이다.
다도와 전통예절 체험을 겸할 수 있는 숙소가 있으며, 마당이 좋아 거의 매일 저녁 작은 음악회로 투숙객을 잠 못 들게 하는 참으로 근사한 한옥도 있다. 대청마루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는 당당한 기와집도 있어 세월에 지친 우리들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녹여준다.
▲ 비빔밥단오날 화전놀이에 참여한 전국의 다인(茶人)들과 일반 참여자들을 위한 비빔밥 비비기. 경기전 수복정에서. ⓒ 이종민
새벽이면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걸으며 그 오밀조밀 다정한 맛을 필히 느껴볼 일이다. 그래도 찌뿌드드하면 사상의학으로 참살이를 꿈꾸는 한방문화센터를 찾을 일이요, 조금 가뿐해진 마음으로 최명희문학관이나 강암서예관을 들러보는 것도 ‘강추’라 할 수 있다.
▲ 화전놀이단오날을 맞이하여 화전놀이 겸 다도체험을 하고 있는 시민들. ⓒ 이종민
금강산도 식후경. 삶의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에는 각종 먹거리가 마련되어 있다. 담백하면서도 정갈한 전주백반, 오묘한 비빔의 조화로 세계가 주목하는 참살이의 전주비빔밥, 애주가들의 속을 달래주는 콩나물국밥, 바람 시원한 한벽루의 오모가리, 옛 향수를 자극하는 칼국수, 그리고 막 땅기는 막걸리와 싸고 풍성한 가맥 등도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이 마을 곳곳에서 우리들 미각을 유혹하고 있다.
▲ 간담회'완전의 땅'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수많은 간담회, 토론회가 전주 한옥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옥 생활체험관 대청마루에서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를 만들어 가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있는 문화예술계 인사들. ⓒ 이종민
하지만 한옥마을은 미완의 터다. 완전을 꿈꾸며 느리게 무르익어갈 뿐이다. 급하게 구경이나 하려는 사람 반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줍은 새색시 같아 진정어린 마음가짐이 없는 이에게는 그 장한 끼를 보여주지 않는다.
귀를 열고 추임새라도 보태려는 마음, 차의 더딘 향에 취할 수 있는 여유, 손수 비빔밥을 만들고 한지로 손거울이라도 만들어 보겠다는 적극적인 마음자세가 있어야 그 은밀한 매력을 나눠가질 수 있다. 말하자면 ‘준비된’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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